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나벤투라 (문단 편집) == 보나벤투라의 [[스콜라 철학]] == 보나벤투라의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미적인 신비가'''. [[머리]]보다 [[가슴]]이 더 중요한 사상가이다. 지금이야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철학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뜬구름 잡기식의 이야기겠지만, 13세기는 철학이 [[신학]]과 기민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학]]이 없는 철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철학계의 큰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1255년 3월 [[파리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종교에 융합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와 충돌점이 아주 많았고, 잘못하면 종교적 사상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열광하여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먼 자연주의적 사상을 채택한 사람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든 [[그리스도교]]에 흡수시키려 노력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에 속하는 인물 중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바로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보나벤투라 및 [[로저 베이컨]]이나 [[도미니코회]] 회원인 대 [[알베르토]][* 축일 11월 15일.] 및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아베로에스(Averrhoës)라는 [[에스파냐]] 출신 [[이슬람]] 철학자의 소개가 중요한데, [[이슬람]]식 이름으로 [[이븐 루시드]](Ibn Rushd)라고 하는 그는 자신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그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한 업적으로 유럽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플라톤]]으로 메우려 했던 [[이븐 시나]]까지도 까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감쌌다. 이렇게 지나치리만치 진취적이었던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사회에서 대차게 까였는데, 역으로 [[유럽]]에서는 여태까지 영향을 끼치던 이븐 시나를 밀치고 일명 '라틴아베로에스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 그 사상이 [[프리드리히 니체|니체]]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조심스러운 중립적 성향이었던 보나벤투라는 처음부터 아베로에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 비판적인 성향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아베로에스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낀 이후로는 태도가 바뀌었다. 大 알베르토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배운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사상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접목 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을 구축했던 것과 달리, 보나벤투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인 로저 베이컨의 지나치리만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장을 비판해야만 했다. 가만 들어보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 그의 주장은 [[신학]]도 결국 [[과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수도자]]로서는 잘못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나벤투라가 1267년 아베로에스파의 주장을 보수적 성향의 [[파리(프랑스)|파리]]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에게 [[고발]]함에 따라, 1270년에는 파리 교구가 아베로에스파가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13개 명제를 단죄, 로저 베이컨도 [[이단]]으로 규정되어 수도회에서 쫓겨났다.(…) 이것만으로 아베로에스파의 활동이 멈추지 않아 보다못한 [[교황청]]이 1277년 1월 탕피에에게 자료를 가져오라 하지만, 성질 급한 탕피에는 자기가 직접 219개의 명제를 만들어 그 내용을 몽땅 단죄해 버린다. 이 사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게도 위기로 다가왔다. 다만 그 때는 보나벤투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고 다 죽은 후였기 때문에…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철학]]을 [[신학]]의 우위에 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죄당하지 않았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간단히 말하면 보나벤투라에게 쫓겨난 로저 베이컨은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고, 大 알베르토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대세였던 그 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잘 버무려 어떻게든 유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중도적 입장, 보나벤투라는 새로 밀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신경 쓰기보다 본래의 [[플라톤]]적 관념에 더 충실한 입장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