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나벤투라 (문단 편집) === 리옹 공의회와 죽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l_concilio.png|width=100%]]}}} || || '''{{{#gold 리옹 공의회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1 ''(San Buenaventura en el concilio de Lyon)''[br]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作, [[루브르|{{{#gold 루브르 박물관}}}]]}}}}}}''' ||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개최한 주된 이유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로마의 역대 황제#s-3|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와 많은 정교회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이는 [[동로마 제국]]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후 약 100년여 동안 동서 교회 일치 시도는 중단된다.]에 [[추기경]] 자격으로 참석한 보나벤투라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자리에서 [[교황]]과 [[가톨릭]], [[정교회]] [[사제(성직자)|사제]]들 앞에서 강론을 한 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회기 중이던 7월 15일 새벽에 사망하였으며, [[교황]]과 모든 [[사제(성직자)|사제]]들이 그의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 대체로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게 정설이지만, 일각에선 보나벤투라가 [[추기경]]이 되자마자 사망한 것을 심상치 않게 여겨 [[독살]]당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카더라]]. 보나벤투라의 유해는 리옹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더불어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던 1562년, [[개신교]] [[장 칼뱅|칼뱅]]파인 [[위그노]]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광장에서 관 채로 싸그리 불태워버린(…) 사건이 벌어지는데, 누군가가 그 와중에 그의 두개골만은 어찌어찌 빼돌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프랑스 혁명]] 때 그마저도 어디론가 망실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를 기념할 만한 물질적인 것이라곤 그저 그가 남긴 숱한 저서들밖에는 없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