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나벤투라 (문단 편집) ===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 보나벤투라는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잉글랜드 왕국]]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1273년까지 [[파리 대학교]]에 출강하여 강의와 설교를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일가 앞에서도 설교할 정도로 저명있는 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활발했던 활동은 자신의 업적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닌, 교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외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쁜 세월을 보내던 1273년 봄, 여느 때처럼 [[파리 대학교]]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강의를 하던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지지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이탈리아 반도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서임'''하니, 이번에는 사양치 말고 [[로마]]로 튀어오라는 서한이 도착한다.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순명을 어길 수 없는 그는 로마를 향한 여정을 떠났고, 무제로라는 곳의 작은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때마침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 사절이 도착했다. 그 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으나, 이 모습을 표현한 성화가 존재할 정도로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는 자기가 [[설거지]]를 다 끝낼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 1273년 5월 알바노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에 임명된 보나벤투라는 대신 [[http://www.ofm.or.kr/|작은형제회]]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된 [[도미니코회]]의 피에르 드 타랑테즈와 페드로 훌리아는 각각 [[인노첸시오 5세]]와 [[요한 21세]] [[교황]]이 되었는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