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나벤투라 (문단 편집) === 작은형제회 총장으로서 === 1257년 선임 총장인 조반디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의 추천과 수도자들의 만장일치로 작은형제회의 총장이 된 보나벤투라는 학업을 잠시 제쳐 두고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본래 작은형제회는 엄격한 청빈 정신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는데,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사후 전체적인 수도회를 이끌 마땅한 중심이 없어 결국 신령파와 수사파로 분열된 상태였다. 신령파는 기존보다 더욱 엄격한 청빈 정신으로 수도회의 질서를 바로잡자고 고집했던 반면, 수사파는 청빈 정신을 고수하는 대신 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해 수도회의 질서를 바로잡자는 입장을 내세웠다. 혼란을 잠재우고자 보나벤투라는 먼저 교통정리를 했다. 우선 그는 분열의 도화선이 된 신령파, 특히 신령파 내에 있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o da Fiore)의 추종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시토회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였던 조아키노 다 피오레는 극단적인 청빈 정신과 종말론적인 주장[* 가령 "[[예수]]와 [[12사도|그의 사도들]]은 완전한 청빈 정신을 따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무소유를 내세워 설교 활동을 했다"든지 "[[성부]]와 [[성자]]의 시대는 실패했고 [[성령]]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을 펼쳐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령파가 이러한 불결한 사상을 들여옴으로써 물을 흐렸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였다. 또한 그는 각지에 설립된 작은형제회 수도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분열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각 분파의 중심 인물들이 피력하는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 타협하는 데에 만전을 기했다. 아울러 그는 분열로 인해 내팽개쳐 있었던 수도자들이 사도적 직무를 재개한 후 이를 성실히 임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 청빈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도 생활 방식이 기본 중의 기본임을 강조하는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근면 성실한 태도와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보나벤투라는 1260년 [[프랑스 왕국]] [[오드(프랑스)|나르본]]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신령파와 수사파의 각 의견들 중 일부를 수용함과 더불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회칙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끔 조정을 한 첫 회헌을 선포해 분열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또 다시 조아키노 다 피오레와 같은 이단 사상이 유입될 것을 방지해 앞으로 간부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출판물이라도 반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수도회의 일치에 기여하기 위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공식적으로 엮으라는 의뢰를 받아 작업에 착수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 도중 [[성흔]]을 받았던 라베르나 산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며 <[[야훼|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을 썼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1263년에 완성되어 피사 총회에 제출되었고, 1266년에 열린 파리 총회에서는 이 대전기(Legenda Maior)[* [[베네딕토 16세]]에 의하면, [[라틴어]]인 '레젠다'(Legenga)는 ~~[[어둠에다크에서 죽음의데스를 느끼며|전설의 레전드]]~~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읽어야 하는" 권위 있는 본문을 의미한다.]만 남기고 다른 프란치스코 전기를 모두 파기하기로 하기까지 한다. 이 덕분에 하나된 프란치스코의 의지 아래 수도회는 다시 뭉칠 수 있었으며,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2의 창립자'''로 존경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