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나벤투라 (문단 편집) === [[파리 대학교]]에서의 생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n_Buenaventura.jpg|width=100%]]}}} || || '''{{{#gold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받는 성 보나벤투라 {{{-1 ''(San Buenaventura recibe el hábito de San Francisco)''[br]대(大) 프란시스코 에레라 作, [[프라도 미술관|{{{#gold 프라도 미술관}}}]]}}}}}}''' || 1235년 보나벤투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인문학 공부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파리(프랑스)|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243년 그는 [[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 출신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신학자 알렉산더 할렌시스(Alexander Halensis)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의 강의에 깊은 영감을 받아 성실히 학문에 임했으며, 결국 알렉산더가 각별히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얼만큼이었냐면 알렉산더가 보나벤투라를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같은 해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를 따라 파리에 있는 작은형제회에 입회한 뒤 파리 대학교에서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이수했고, 1248년 자신의 모교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유명 스콜라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피에르 롱바르]]가 쓴 <명제집>에 관한 강의를 맡았으며, 동시에 해당 저서의 주석을 저술해 1255년 마지스테르 학위[* Magister. 현재의 [[박사]] 학위에 해당한다.]를 취득했다. 그러나 학문적 명성을 차치하고 보나벤투라의 교수 활동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파리 대학교에서는 재속 [[수도자]][* 수도회에 속해 있지만 세속에서 지내는 평신도를 일컫는다.]가 아닌 탁발 수도자를 교수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세속 학자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그 학자들이 보나벤투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특히 기욤 드 생타무르(Guillaume de Saint-Amour) 교수는 대다수의 탁발 수도자들이 속해 있는 작은형제회와 [[도미니코회]]를 맹비난을 함으로써 대학 내에 탁발 수도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다. 이에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가르치는 수도자 학생들을 지키고자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도자이자 친구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여러 탁발 수도자 동료들과 함께 혐오 세력에 맞섰다. 보나벤투라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기욤이 내세우는 입장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했고,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데에 기여했다. 하지만 1256년 기욤은 <근래의 위험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해 물러서지 않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좀체 사그러들지 않자 결국 보나벤투라는 그 해에 교수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257년 보나벤투라는 탁발 수도회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 기욤을 비판하며 이런 태도를 고수하다가는 훗날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뒤 대학을 떠났다. 이때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신학 박사를 칭호를 얻었는데, 이는 수도자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그 해에 보나벤투라는 작은형제회의 탁발 수도자들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공로로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기욤 드 생타무르는 결국 보나벤투라의 경고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앙화를 받았다.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기욤에 분노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257년 보나벤투라가 학교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욤이 집필했던 모든 논문들에 대한 승인을 취소한 후 전부 불태운 것을 모자라 그를 [[파문]]하고 국외 추방을 명령했다. 알렉산데르 4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266년이 되어서야 추방 명령이 철회되어 기욤은 다시 프랑스 왕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어떤 대학도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욤은 1272년 [[부르고뉴]]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