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전쟁의 동기 == [youtube(neNCo5DeoTo)]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병자호란의 원인이 됐음이 20세기 초 하야시 다이스케에 의해 지적됐으며, 병자호란의 원인을 정묘맹약 이후 누적된 양국간의 경제적 마찰에 비중을 둔 이나바 이와키치의 경우도, 일련의 '존호 문제'를 병자호란의 동기로 설명하고 있다.[* 稻葉君山(1914), 제20절 <第二次朝鮮役及び其經過>, 《淸朝全史》상권, p. 321~325; 허태구(2017),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丁卯․丙子胡亂 관련 주요 연구 검토>, 《朝鮮時代史學報》 81.] 한국의 호란 연구에서도 명의 모범적인 조공국인 조선을 통해 위상을 정립하려는 홍 타이지가 인조에게 존호 문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강경한 척화론을 촉발하여 사신들의 도주와 절화교서의 탈취를 초래했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호란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는 것이 통설을 이룬다.[* 노기식(2001), <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中國史硏究》 16; 宋美玲(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韓明基(2017), <明淸交替 시기 韓中關係의 추이>, 《東洋史學硏究》140;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41~145; 계승범(2020), <1637년 청나라의 조선 정복 전쟁 -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에 대한 서평> 70~72쪽, 《[[동북아역사논총]]》 69, p. 333.] 의미 부여의 차이지만, 홍타이지의 존호례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이 이틀간 배례 거부를 한 것이 중대한 계기[* 한명기(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p. 150~151;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46.] 및 직접적인 동기[*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김영진(2020), <천총 연간 후금의 조선 사신 접대 양상과 그 의미>,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가 됐다고 보거나 이들이 국서를 버린 것을 계기로 양국의 국서 교환이 단절됐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 60.] 즉, 공물 수량을 두고 양측이 마찰을 빚은 것은 수량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승하는 후금의 위상을 조선에게 반영하려는 것이 본질이었다.[* 노기식(2001), <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中國史硏究》 16; p. 3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