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인식 ===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과 사대를 끊고, 새롭게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은 매년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은 병자호란의 원한을 잊지않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대기도 했다. 이 북벌론은 조정에서는 효종 사후 사그라들었지만, 민간에서는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명나라 멸망 이후에 조선은 자발적으로 명을 기리며 선진 중화문명의 진정한 후예가 조선임을 자처했다. 이를 [[소중화]] 의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만 이런 의식과는 별개로 겉으로는 양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일단 조선과 청은 커다란 마찰 없이 비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현종 시절 조선이 [[을병대기근]]이 들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자 [[강희제]]는 직접 지시해 5만석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북경에 간 조선 사신들이 다른 조공국들보다 청황제의 우대를 받아 상석에 앉거나 여러 편의를 제공받았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종]]시절 백두산 부근의 영토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은 분쟁이 일어났으며, 조선과 청나라는 군사적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담판하여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자세한 사항은 [[백두산정계비]] 참조. 병자호란 직후에 청이 조선에 고압적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청관계]]도 정상적인 외교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조선왕조는 청에 대해 애증이 있었던 듯하며,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원한은 구한말 고종 때까지 잊지 않았지만 청나라의 [[강건성세]]를 지켜 본 영정조대 이후로는 사대부들도 청나라가 정통 중화왕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정약용]]도 하피집(霞帔帖)에서 '청나라는 지식이 일반화되어 일반인이 공부하여 성인이 되는데 별 어려움이 없으나 조선은 그게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이때부터의 청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가도중쇠).] 당장 조선에 일본과 서방과 위협이 증대하자 오랑캐로 무시하면서도 상국으로 여기던 청나라에 자문을 구했다. 조선이 서양세력과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도 청나라 북양대신인 [[이홍장]]의 자문을 받고 진행된 것이다. 또한 조선 조정은 내정의 문제인 [[동학농민전쟁]]까지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이는 일본의 개입을 불러 조선왕조 멸망의 원인이 된다. 1897년 조선이 칭제를 하기 시작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은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는 감히 조선이 참람되이 황제를 칭한다며 성토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이미 청나라는 서양에 쥐어터지며 제코가 석자인데다가 [[청일전쟁]]이후 조선에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인해주고 [[삼전도]]에서 맺은 군신관계가 폐기되고, 이제부터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인정했다. 1899년에는 외교적 필요에 의해 청나라는 조선에 [[주한청국공사관]]을 설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