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군사적 실책 ==== 인조 대에 들어서 수적으로는 우세해진 조선이었으나, 병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선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청조에게 밀렸으므로, 중요한 전투마다 밀리게 되어 결국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 * 청군의 쾌속 진군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청야전술은 시행하지도 못했다. 당시 청군이 대략 15일~20일치 군량만 준비하였다는 사실과 청군은 조선에 들어갈 군량만 준비하였지 돌아올 때 필요한 군량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청야전술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것이 뼈아픈 패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http://gil092003.egloos.com/9985015|1달만 버텼으면 청군이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역덕의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인조를 최대한 빨리 사로잡아 조선 전체를 조기에 항복시키는게 당시 청군의 목적이었던 만큼 청군은 조선의 주요 방어거점들을 전부 그대로 내버려둔 채 논스톱으로 한성으로만 쾌속 진군을 하였고, 여기에 한성에 청군이 도착하기전에 청군을 막기로 되어있던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이 이러한 청군의 계획을 전혀 모르는 상황속에서 원래의 작전 계획대로 관민들을 모두 끌어모아 산성에 들어가서 청군을 상대로한 수성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군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고속도로를 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 이를 두고 광해군은 청군이 곧장 한성으로 쳐들어오는 상황까지도 염려하고 있었는데 왜 인조는 그러지 못했느냐며 원망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는데 사실 광해와 인조 사이에는 정묘호란이란 이벤트(?)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한다. 즉, 아직 청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겪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광해군은 모든 상황들을 다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반면, 서북 각지를 들쑤신 정묘호란을 미리 맛본 인조는 다음 침략 역시 그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조는 과거의 전훈을 너무나 충실하게 검토하고 곱씹은 나머지 전례에 심각하게 얽매여서 그만 일을 그르쳤다라고 볼 수 있겠다. * 전략적으로 굉장히 무능했다는 점이다. 전술했듯이 인조는 병법에 무지했다. [[이괄의 난]] 1달 후에 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를 방비하자는 논의를 하던 중 안주성[*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 시절 [[안북성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병력이 너무 적어 보충해야한다는 의견에 "자고로 개쩌는 장수 한명만 있으면 아무리 병력이 적어도 전쟁에서 이겨. 그리고 오랑캐 추장이라는 놈은 x밥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건 병력을 모으는게 아니라 뛰어난 장수를 찾아서 배치하는 거야."라는 황당한 말을 하게 되고, 이를 들은 [[정충신]]과 남이흥은 황당해 하며 인조에게 "아니 병력이 없으면 그게 말이 안되는 거라니까요. 저희가 아무리 모자라도 10만명만 주면 [[요동성]]도 정벌할수 있습니다."라며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아무리 이순신, 항우, 리처드 1세가 와도 휘하에 병사가 한명도 없었다면 잘해봐야 인간무쌍 찍고 전사했을 확률 100%다. 공성전에서는 방어측이 유리하고 공격측이 불리하다 하나 병사 하나 없이 장군만 있으면 성 위에서 고립되어 성문을 뚫으려는 적군을 멀뚱멀뚱 쳐다보는거 외에 할것이 없다.] 거기에 병자호란 직전에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격문을 청으로 보내버리면서 사실상 전쟁개시를 알려버렸다. >"'''군사가 적더라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다.'''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싸울 수 있으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싸우기만 해서도 안 되고 지키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요는 임기응변하기에 달려 있다.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쳐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중략)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 >하니, 정충신이 대답하기를, > >"'''우리 나라는 본시 군사가 없는 나라인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습니까. 지금 10여 만의 무리를 뽑아서 1년 ∼ 2년 동안 훈련시킨다면 요동(遼東)도 진격하여 빼앗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수어하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창성(昌城)·의주(義州)·안주(安州)의 제진(諸鎭)이 가장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각각 민병(民兵)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도록 당부하고, 입방(入防)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편의대로 수어하도록 하고, 패강(浿江) 이서에는 가을 이후에 청야(淸野)하여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이 오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 >하고, 남이흥이 아뢰기를, > >"부원수의 수하 군사는 2천이 못 되니, 어떻게 이것으로 큰 적을 대항하겠습니까. '''정병 수만을 교련할 수 있다면, 신처럼 못난 자도 목숨을 바쳐 싸워서 스스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이어 주찬(酒饌)과 표피(豹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무진 1번째 기사. 연안 부사 남이흥 안주 목사 정충신과 함께 오랑캐의 방어 등에 대해 의논하다. 이처럼 실무진들의 의견과 인조를 비롯한 국가 운영자들의 생각이 엇나가니 방비는 했다곤 하나, 제대로 된 방비가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 인사 정책 면에서 야전을 경험해 본 실제 지휘관들에겐 제대로 된 군권이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2번에 걸친 침략에서 [[평안도]]에서 이름을 남긴 장수들은 수백명만 갖고도 전쟁이 끝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들의 지휘력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는데, 인조의 측근들이 수만명을 갖고도 태만하거나 패배했던 행적과 매우 비교가 된다. * 단순히 병력의 질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배치 또한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인조는 [[정충신]] 같은 국제 첩보 인력을 국내 감시용으로 썩혀버렸고, 북방에서 유일한 군단을 이끄는 [[도원수]]에는 [[김자점]], 최중요 거점인 [[강화도]]에는 [[장신]]과 [[김경징]], 체찰사에는 [[김류]] 등을 배치했다. 그 결과 김자점은 북방군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남한산성의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김류는 아들인 김경징의 안전을 위해 직접 강도검찰사에 김경징을 천거해 관철시키는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가족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장신과 김경징은 강도의 방어를 허술히 하여 청군에게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원균]]급의 간신들이 우루루 사령탑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전쟁은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는 선조가 초기에는 [[이순신]]과 [[권율]]처럼 각 지방의 실무자들을 대우했고, [[류성룡]]이라는 전시 재상을 잘 써먹으면서 인재 기용에 있어 특정한 당파 논리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점과 대비된다. 물론 선조도 전쟁 도중에 [[이순신]]과 [[의병]]들을 족치려고 [[원균]]과 측근들을 기용하여 실무자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인조는 [[붕당]]에 매몰되어서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원균]]급 비실무자들을 권력의 측근 혹은 측근이 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3명씩([[김자점]], [[장신]], [[김경징]])이나 대군의 군권을 주거나 중추 지역의 지휘관으로 앉혀놨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이는 또 선조가 평범하게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라면 인조는 반정으로 집권했다는 차이에서 오기도 했다. 선조가 특정 붕당이나 세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던 반면 인조는 반정공신을 필두로 한 지지세력을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선조는 그래도 저 멀리 의주까지 도망이라도 잘 가서 왕이 사로잡히는 최악의 상황은 안 만들었다. 참고로 이에 대해서는 반박 견해도 있는데 하나는 이는 인조에게 억울하다는 것이다. 선조는 남쪽에서 명나라(요동)가 있는 북쪽으로 인조는 명의 지원을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쪽에서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인조가 무려 부산까지 도망쳤고 이후에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일본을 상국이라 받들어 모시면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온 명나라와 달리 불과 수십년 전에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한 국가라서 그 정치적 후폭풍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또 다른 견해들도 있는데, 일본으로 굳이 갈 필요 없이 호남 방향으로 내려가서 제주도로 가도 된다는 견해와 부산까지만 가도 충분히 청군의 보급선이 길게 늘어나서 청군에게 큰 부담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부산까지 갈 필요도 없고 강화도로 가서 황해도 수영, 충청 수영, 전라우수영의 수군들과 금군을 강화도에만 깔아놓는 데 성공해도 제해권이 부족한 청나라는 강화도를 쉽게 뚫기가 불가능하다는 견해,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에 충분한 물자만 비축했어도 장기간의 수성전이 충분히 가능했었다는 견해 등이다. 물론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인조의 실책이 병자호란에서의 패전을 야기한 것만큼은 확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