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인조옹호론 === 앞서 언급했듯이, 인조와 조선 정권은 나름 대비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의 군사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아 청나라의 침입을 방비하려 했다. 하지만 [[광해군]] 시절의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의 기세가 더욱 세지자[* [[사르후 전투]]는 명군이 주력이고 조선은 약간 힘을 보태는 정도였다. 근데 기후가 후금을 도운 데다가 명군에서 벌어진 지휘관들의 내분 덕분에 어이없이 각개격파를 당했다.] 국방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광해군 일기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광해군]] 대에 북방에 배치한 숫자들의 병력은 상당했고, 무기들도 꾸준히 지원하고 군사 훈련도 자주 시키는 모습이 보이며, 쓸만한 무장들을 골라내 배치시키며 이 때 [[정충신]]과 남이흥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발탁되어 중용되기도 했다.[* 사실상 [[광해군]]의 [[외교]]의 핵심은 [[정충신]]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충신이 아프면 일이 미뤄질 정도였다. 광해군의 외교를 지지하던 것은 [[대북]]이 아니라 '''[[소북]]인 박승종과 [[서인]]인 윤휘, 정충신이었다.''' 그리고 윤휘는 광해군 몰락 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서인들 중 강경파들에게 살해 시도를 받기도 했으나 유능한 능력 때문에 살아남았으나 [[인조]]는 딱히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탓에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윤휘에게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사죄했다고도 한다. 또 정충신 역시 [[이항복]]의 제자로 따지자면 서인 쪽임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정작 조선을 구원할 비전과 가능성이 있었던 유능한 서인들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기에 한직으로 밀려나는 인조 정권의 한계가 낳은 비극이라고 봐야할 듯.] 또한 [[홍타이지]]를 경계하며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와 다이샨을 이간시키려는 시도도 벌어졌고, 후금에 대한 첩보를 명하여 상세한 정보를 얻어내고 홍타이지 포섭 시도는 명나라에는 그냥 적진을 탐색하는 것으로만 알려지도록 속여넘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설마 단 5일만에 [[의주]]에서 [[서울]]까지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하루에 약 75km 이상 주파한 것으로, 2차대전 당시 전격전의 대명사인 롬멜의 기갑부대보다 빠른 속도였다. 병자호란 당시엔 고속도로는커녕 제대로 된 포장도로 조차 없던 흙길이었다.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조선을 칠 것이라 보고 서북 방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도성의 병력이 3,000명 밑으로 떨어져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가 조선에 새로이 요구한 군신관계는 그 이전의 형제관계와는 달리, 명의 번국으로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신앙적으로 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수차례 화북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축을 노획하였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 그 중에서도 당시 명나라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산해관]]의 책임자였다.]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었다. 명이 부모의 나라에다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까지 있어, 그 신앙이 크게 강화되었기에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 광해군 때 이중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 톤가량의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국운이 쇠하고 있던 명에도 크게 부담이 되었으며 만력제는 '고려천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었다. 참고로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이는 대명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은 이중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즉,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이 쳐들어온 가장 근본적인 전략적 원안 자체는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등에서 명과 청이 공유했던 인식론으로서, 조선이라는 국가는 광해군 정권처럼 결국에는 명 제국에 부역할 가능성이 있는 후방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는 웃기게도 명이 바랬던대로 광해군이 후금에 대하여 어그로를 끄는 역할을 수행해주면서 명이 바랬던 대외전략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는 한계는 있다. 요약하면 광해군이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명은 조선을 후금에게 대신 쳐맞아주는 역할의 고기방패로 던져주고 뒤에 숨어서 전략을 굴리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사실 조선에 대한 수탈과 후금의 조선침략과 동시에 명나라의 방관 및 느린 개입이라는 큰틀에는 큰 변화는 없었으리라는 예측이 많다. 상당수의 옹호 측에서도 광해군 개인이 신경썼던 첩보의 의의를 고평가 해주는 것과, 구체적인 외교력의 실제 파급력은 전혀 별개라는 평가이다. 거기에다 기본적으로 광해군이 육성해놓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와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또한,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 유지론을 반대했다'''. 한마디로, 광해군 개인의 첩보가 실리적이었다는 것은 국가적인 규모에서는 중요치 않다. 애시당초 광해군 본인이 온갖 숙청과 정치적 악행의 도구로 써먹으며 양성한 정치세력들이 거기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중립외교 따위는 실제로는 그 추진동력이나 실체가 제대로 없었고 현대인들이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광해군의 조정은 서인들보다 무식하고 위험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심지어 서인들도 집권 후 숭명 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물론 후대의 인조 역시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한 만큼 친명에 더욱 얽매이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 왕조에서 단기간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들을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선조가 만들어놨던 인재 풀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 북인 친명파들을 이용하여 입바른 신하들을 없애다보니 꼴통 선비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이 때 항복한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내통하려고 해보려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그냥 협박용으로만 사용했으며 별다른 구체적인 이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과 증거는 없다. 많은 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라는 것은, 오히려 명나라의 선양질에 꽁해서 입에 발린 칭찬은 하면서도 뒤에서는 명나라에게도 은근슬쩍 술수를 부리던 선조의 임진왜란 직후 외교 정책을 이어받은 걸로 보고 있다. 애초에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조선을 전쟁터로 삼을 수 있었던 명과 청이라는 양대 제국에서 광해군의 의사와 외교를 특별히 신경 썼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광해군이 청을 방비하고 동시에 명에게 최대한 관심을 덜 받으려고 했던 흔적은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광해군 시대의 외교 행보를 경험했던 명 제국, 청 제국은 "조선을 명이 철저한 따까리 고기방패로 써먹어야할 국가이자, 청이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 꼭 행동불능에 빠트려야할 후방전선으로 보는 생각"을 각자 내부적으로 더욱 강화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듯 광해군 시절에 더욱 확실해진 조선에 대한 전쟁관을 두고, 광해군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든지 어떤 제국에게도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중립외교라는 단어가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이미 찬반이 존재하고 있다. 즉, 홍타이지와 후금의 강경파들은 무슨 일이 됐건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이후로 조선을 손봐주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했고, 명나라는 무슨 일이 됐건 광해군을 보면서 조선을 충실한 고기방패로 써먹으며 조선과 요동 뒤에 숨어서 살겠다는 생각을 도리어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조선을 언제든지 명 제국의 고기방패, 청 제국의 약탈 대상으로서 제국들의 전략이 더욱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시기는 실제로는 오히려 광해군 치세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던것은 맞다. 하지만 호란의 모든 원인이 인조에게만 있었는지와 광해군식의 외교정책이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지속 가능한 외교였는지 마지막으로 광해 시절의 조정 신료들이 그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이 있다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듯 청을 관대하게 보면서 인조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분명 당시 정부의 실책이 있었고 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분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청 역시 조선에 상당한 만행을 저질렀다. 기록만 봐도 <지천집> : 50만 명이 포로, <남한일기> : 심양으로 속환한 사람 60만 이상. <산성일기> :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 66만 이상, <비어고> : 60만 이상이 포로.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 50만~60만이라는 추정치는 딱히 믿을만한 수치는 못 되기는 한다. 당시 청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인하여 50만~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중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44352|출처]]], 무엇보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당시의 전쟁 결과와 당시 조선인들에게 널리 퍼지던 [[천연두]]로 인한 조기 종전이라는 결과를 생각하였을 때 누가 천연두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청군이 대규모로 포로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이유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은 터무니없다고 직접 반박하였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출처]] 만약 청군이 끌고 간 조선인 포로들이 정말로 50만~60만 명이나 되었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천연두에 걸린 조선인들까지도 대거 포로로 끌려가면서, 청나라가 천연두로 인해 조기에 멸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저러한 포로들의 규모는 막상 청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