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흑역사로 치부된 전쟁 === 병자호란은 그 피해가 [[임진왜란]]보다 상대적으로 경미했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충격과 영향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조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일반인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미미한 편이다.''' 왜란은 전쟁 초반에는 여러 성읍들과 수도인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정도였을지언정 중반, 후반에는 침략 / 점령한 일본군들을 몰아내는 통쾌함은 있었고, [[이순신]], [[권율]], [[곽재우]], [[김시민]], [[조헌]] 등 수많은 명장 영웅들이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성 전투, 명량 해전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해 승전을 거두며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정권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조선은 이를 "천벌"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도 한민족은 여러 전쟁을 겪었으나 이렇게 별다른 항쟁도 못해보고 철저히 패배한 전투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임진왜란에서는 도오토미의 침략의지가 너무나 뚜렷했고, 조선은 이에 맞서 여러 호국 영웅이 나왔으나,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략의지보다는 조선측의 외교실패나 전략적 실책이 너무나 명확한데다가, 전쟁이 터지자 항쟁은커녕 청나라의 전략에 말려들어가 철저히 패배했다. 청나라측은 [[심리전]]에도 능해서 침략의 명분을 조선측에 전가하는 선전을 펼쳤고, 그리하여 포위된 남한산성의 일선 병사들조차 주전파들을 청나라에 보내라며 조정에 항복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조선측은 가혹한 청나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20년전만 해도 자국을 상국이라고 부르던 여진족/만주족에게 참패를 당하고 상국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왕자들이 볼모로 끌려가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만주족과 청나라는 명나라가 부활해 오랑캐를 토벌해주기를 바라던 조선측의 바람과는 달리 이후로도 승승장구를 해서 대륙을 장악했고, 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씨는 대가 끊겼지만, [[강건성세]]시기의 청나라는 조선의 사대부들조차 그 번영에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를 옹호하는 일부 역덕들이 반론을 제기하고는 있지만, 병자호란의 대중적인 인식은 조선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낡은 성리학적 화이관 및 맹목적 사대주의를 고집하다가 참화를 당한 [[흑역사]]로 간주되고 있다. * 전쟁 기간이 '''2달''' 정도로 지극히 짧은데다가. 초창기에 산성을 무시하고 빠르게 진군했기에 피해 지역도 적은 데다가, 그만큼 기록도 적고 기간도 짧아서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다. 청군의 침공로에 있던 평안도 지방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되지만, 이곳은 사실 조선 역사에서 변방지역이었고,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조선의 핵심 농업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경상-충청 지방이 완전히 쑥밭이 된 임진왜란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바로 앞에 '7년 전쟁'이라고 불렀던[* 북미-유럽의 동양 사학계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명칭은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당시 참전한 한중일 3국에서 각자의 입장에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라(한국 - 임진왜란, 일본 - 분로쿠의 역, 중국 - 항왜원조전쟁) 이런 중립적인 명칭을 채택했다.] [[임진왜란]]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영향도 병자호란의 평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식민사관의 주 논거중의 하나인 만선사관과 타율성론이 병자호란의 주원인을 조선왕조의 무능탓이라고 돌렸다. 만선사관은 한반도(조선반도)의 역사는 만주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므로, 만주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만주족으로 바뀌었으나 조선이 이에 순응하지 못해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고, 타율성론은 조선왕조는 자주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빠져 국제정세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도 병자호란을 불러온 맹목적 사대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어긋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것이고, 인조 정권은 집권 내내 자국의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후금을 자극하다가 정묘호란이 벌어졌는데도, 이에 교훈을 얻지 모하고 계속 비현실적이고 사대적인 태도를 고수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 [[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이 당시에는 [[재조지은]] 담론에서 보듯이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대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다. 오늘날 전근대 중화체제가 일변하여 [[중국]]을 진정으로 [[한국]]의 상국으로 보는 인식이나 중국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만주족]]을 [[오랑캐]]로 보는 시선도 사라졌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다가 이미 농민반란이 빈발하며 몰락해가던 당시 명나라의 상황도 부각되는 만큼 전쟁에 대한 원인으로 흔히 간주되는 '명에 대한 사대'가 오늘날에는 한심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 조선의 전쟁 수행 및 사후 처리에서의 문제점, 인조가 자초한 일부 실책들. 인조와 조선 정부의 군 인사 정책은 너무나 한심했고,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에서 이는 조선군의 약화를 초래했고 결국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전후 인조는 이런 책임자들의 처벌을 게을리하고 끝까지 비호했다. 여기에 [[소현세자]]에 대한 홀대와 [[민회빈 강씨]]의 옥사 등 개인의 인성 부분에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집권 후반기에 대동법 개정 등 개혁의 성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조 정권은 악평을 받을 수 밖에 었다. * 향토사적 연구 기반의 부재. 치욕의 역사라 해도 일단 자기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어떻게든 관심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으나, 전쟁의 주 무대인 경의연선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 있다보니 향토사 연구 같은 걸 할 환경이 못된다. 향토사 같은 것도 남한에서는 경제가 먹고살만해진 90년대부터 향토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인데, 북한에서는 당장 그런 걸 연구할 형편이 못되고, 설령 연구가 되더라도, 남한까지 그 연구성과가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북한의 강력한 국수주의-민족주의 하에서 민족의 흑역사인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으로 되기 힘들다. 남한에서는 그나마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격전이 벌어졌던 [[광주시]]나 [[성남시]] 정도가 관심이 있는 편지만 [[강화군]]도 병자호란보다는 대몽항쟁이나 군내에 산재한 군사유적들과 연관된 병인·신미양요 쪽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병자호란의 결과는 인조정권 및 조선왕조의 무모한 대명사대주의 및 화이관에 있다고 평가되지만, 2010년대부터 어떤 학자들은 인조책임론을 앞세운 전통적인 병자호란에 대한 통념에 반대해, "병자호란은 애초에 조선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고 청나라의 식량난 때문에 오히려 조선을 정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청나라의 자멸행위였다." , 혹은 "처음에는 진짜로 조선 정복이 목적이었는데 천연두 때문에 그 목적이 급히 수정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는데,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인조 옹호론의 근거를 삼고 있다. 그리고 인조 옹호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역덕들 사이서도 청나라를 욕하고 비방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데 막말로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기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양아치 나라라고 하며 아편전쟁은 병자호란의 업보다. 이런 식의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 내에서의 반중, 혐중 기조가 강해짐에 따라 현재 중국의 행태를 호란 당시 청나라의 행태에 빗대며 현재 중국의 패권주의의 원류가 바로 청나라라는 사이비 역사를 주장하는 쪽도 생겨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