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항복,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 여하간 이후 봉림대군과 왕족들은 청군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 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 사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각지에서 오던 근왕군이 모조리 격퇴당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최후의 거점인 강화도가 함락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근왕군이 모조리 무너졌어도 강화도라도 사수했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그냥 철수하거나 [[인조]]만 잡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백제]] 멸망 때처럼 인조와 그 자손들은 조선의 왕좌를 지키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과 남한산성의 극도로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이미 조선군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척화신을 청군에게 압송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조정에서도 '군사들의 마음이 변해서 외적보다 심각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더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했다.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조선)|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 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몇 차례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그러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여 1월 27일에 항복 문서를 보낸다. >조선 국왕 신 이종[* 실록 원문에는 임금의 이름을 [[피휘]] 하기 위해 성휘(姓諱)라고만 기록되어 있다.]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전국(全國)을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최명길(조선)|최명길]]은 [[인조]]의 굴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를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의식을 대신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날 [[김상헌(조선)|김상헌]]과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월 28일 홍타이지의 답변이 도착한다.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이게 나중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적대하는 주요 떡밥이 되지만 자세히 보면 인조의 설레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문장에는 '아들'이라고만 언급했지 소현세자를 언급하지 않아 세자도 세자지만 하는 거 봐서 봉림대군을 인조 대신 세울 수도 있다는 소리다.] >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거든, 혹은 수만 명을 기한 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사로잡힌 사람은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 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조선은 청나라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나라 황제가 수여한 고명과 책인[* 고명(誥命)은 황제가 제후 등에게 주는 임명 조서, 책인(冊印)에서 책은 책봉 내용을 담은 문서, 인은 인장을 뜻한다.]을 바칠 것. *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을 것. * 명나라의 연호 대신 청나라의 연호를 쓸 것. * 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나라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 청나라가 명나라와 가도[* [[모문룡]]이 설치한 명나라의 동강진이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원숭환]]에게 감독부실로 처형당했는데, 동강진은 이후 심세괴의 지휘 하에서 1-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 정기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것. *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무조건 [[심양]]으로 송환할 것.[* 다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켜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애시당초 노동력 부족 때문에 끌고 간 것이어서 생긴 문제였다.] *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 근데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후 만주족 남성들이 한족 여성들을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팔기군에 편입된 후 만주족에 동화되어 만주족과 통혼하는 경우는 많았다.] *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 이것 때문에 [[봉림대군|효종]]이 즉위년에 성곽을 개수하려다가 [[청나라]] 사신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경석]]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유배가 있었던 [[김자점]]이 효종의 대외정책을 청나라에 고자질한 것이다. 결국 김자점은 이 사건으로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나라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 그냥 [[소]]가 아니라 물소의 뿔인데, 조선군의 주력 무기 중 하나인 [[각궁]]의 주요 재료다. 문제는 이게 정작 [[조선]] 땅에선 나지 않아서 [[명나라]] 아니면 [[일본]]을 통하여 [[오키나와]]에서 수입하던 것….])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향신료였다. 요즘은 흔해 빠진 게 후추지만, 당시엔 값도 매우 비쌌고 물량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 조달해야만 했다.](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丹木: 소목(蘇木)이라고도 하며 붉은 물감의 원료로 주로 천을 붉게 물들일 때 쓴다.)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흰모시)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를 후대까지 대대손손 알리기 위해 지금의 서울시 [[석촌호수]] 자리에 '''[[삼전도비]]'''를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