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한산성]] === [[파일:external/dbr.donga.com/67_MA_138_HM_p153_G1.jpg]] 결국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단 8일 만에 수도인 [[한양|한성]]을 내주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록(19일)을 큰 차이로 경신했다.''' 이후 청나라가 장사꾼 행렬로 위장한 300기의 기병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신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가 로오사의 선봉대는 300기에 불과했고, 후속 본대는 아직 뒤따라오는 중이었음에도 조선은 이들을 수만 여 명에 달하는 청군의 본대 병력들이라고 그만 착각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선조처럼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랑 기동력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뭐라고 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일본군은 거점 지역을 점령하면서 올라갔다. 물론 후방을 무시하는 바람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시달리고, 이순신도 왜군의 배를 부수는 바람에, 해상 보급이 늦어졌다. 결정적으로 청의 초월적인 기동력의 원인에는 다수의 기병이 있었다. 반면 일본의 주력은 보병이였다.] 게다가 청군이 병력을 쪼개어 시차를 두고 이동했던 만큼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청군의 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언제쯤 다 진군할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근왕(勤王)을 위해 섣부르게 남하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자체의 방위력은 충분하여 전쟁 초반의 공방전에선 조선군이 선전하였다. 12월 18일에는 원두표가 응모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서 30명의 청군을 죽이며 적의 진입을 저지하였으며,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성으로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하여 청나라 포병들을 공격해 격퇴시켜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조선 왕조 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다만, 연려실기술이 저격을 언급한 24일에 포탄이 성내로 떨어지고 남성으로 적이 육박하여 격퇴했다는 내용은 있다. 격퇴를 어떻게 했는지는 연려실기술이 2차 사료임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요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냐고 감이 안 잡힌다면 영원성 전투에서 20,000명의 명군이 160,000명의 후금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 홍이포였다. 물론 천자총통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용하게 써먹은 최신은 아니나 구리다고는 할 수 없는 포이긴 하지만 유럽 기술까지 접합되어 탄생한 홍이포보다는 못할 터인데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잡았다는 것이다.]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래 본문에는 홍이포와 호준포의 이름이 혼용되고 있으나, 중근거리 소형 산탄포인 호준포와 달리 모과만한 포탄을 수십 리 날렸다는 점을 보면 홍이포임을 알 수 있다. 천자포는 천자총통의 다른 이름이다. > (전략)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대,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蹲)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후략) * 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연려실기술> 제 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06&gunchaId=av025&muncheId=01&finId=004&NodeId=&setid=7499959&Pos=1&TotalCount=4&searchUrl=ok|#]] 종종 DB 사정으로 검색이 안되거나 링크가 말을 안들을 경우 안정화되기를 기다렸다가 검색어로 천자포, 혹은 신경진 천자포로 검색하면 된다. ||[youtube(SoNQgUfqb_o)]|| 하지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있던 식량 창고를 광주 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본래 청군은 20일 정도 밖에 버틸 식량이 없었지만, 이 때 한강변에 떡하니 있는 식량창고를 청군이 활용해서 45일간 포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오히려 남한산성 내부가 식량 부족을 겪었다. 단순히 남한산성의 버티는 시간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청군의 군량미를 대폭 줄여 청군을 보다 힘겹게 했을 것이다.]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4,000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2,000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진눈깨비가 내리자 인조가 "저 하나 죽는건 몰라도 백성들과 군사들이 뭔 죄가 있어 죽어야 합니까. 제발 날이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주십시오 하늘이시여!" 라고 울먹이며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며 절해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남한산성의 장병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월 23일 남한산성의 수비군 수백 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병조]]의 하급 관리를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이는데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몸소 보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라며 야유를 보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시지요..."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평시에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보다 심각하다[今日軍情, 甚於外敵]"고 할 [[http://sjw.history.go.kr/id/SJW-A15010260-00500|정도]]였으니,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전략) >26일에 장수와 사졸들(신경진과 구굉의 진영의 장사들)이 또 대궐 아래로 나아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대포에 맞아서 성첩이 모두 다 파괴되어 사세가 이미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문사들은 단지 고론(高論)만 일삼고 있으니, 문사들에게 망월대를 지키고 막도록 하소서.” (중략) 하고, 이내 대궐에 들어가 곧바로 진달하려고 하였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말하기를, “비록 위태롭고 급박한 날을 당했더라도 대내(大內)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하고, 이어 병조 낭청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대궐문을 지키면서 어찌 난병(亂兵)이 여기에 이르게 하였는가.” 하면서, 칼을 뽑아 들고 쳐죽이려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말하기를, “승지가 칼을 뽑으니 용맹하다고 이를 만하다.그러나 적을 베는 데는 용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는 사람의 목을 베려 하는가. 승지는 재주와 꾀가 있는 것 같으니 만일 오랑캐의 진중에 데리고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오라. 속히 나오라.” 하자, 동료들이 권하여 이행원을 피하게 하였다. 임금이 다른 승지를 시켜 군사들을 온화하게 타이른 뒤에야 진정되었다. 《병자록》 《잡기》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60_010_0040_2002_006_XML|연려실기술 제25권中]] 장병들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영화)|남한산성]]에서도 등장하였듯이 실제로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12월 25일경부터[* 정확히는 24일에 인조가 가마니를 지급하도록 하교하였다고 승정원일기에 서술되어 있으나, 25일에 "(날이 춥기 전에) 미리 나누어 준다면 필히 깔고앉아 다 해지게 될 것" 이라는 관향사의 계와, 가마니를 근근이 나누어 주었다"는 대사간의 보고가 있던 것으로 보아 일시에 전격적으로 지급한 것은 아니다.] 가마니[* 인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空石, 공석으로 표기되어 있다.]를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5일에 굶어 죽게 될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일 것을 도체찰사가 제안하여 나흘 후인 1월 1일에 병사들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마니를 줬다 뺏는 건 사람 할 짓이 아니니 그 부분은 영화적 각색.....'''이었으면 참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정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사흘 후인 1월 4일에 비변사에서 사복시(말을 관리하는 부서)의 말과 역말이 굶어 죽을까 두렵다며 가마니를 다시 거두어 들일 것을 제의하고, 인조는 '''별 말 없이 승낙한다.''' 음력 1월 4일은 양력 1월 29일으로, 현대의 남한산성 기준만 해도 평균기온 영하4도 내외, 최저기온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가 기승인 때인데 '''"그러나 점점 기후가 포근해져 군사들이 추위에 떨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이 매우 위급한 정도가 아닙니다"''' 운운하니...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5_01A_04A_00060_2013_037_XML|출처: 승정원일기 55책 인조 15년 1월 4일 갑진 5번째 기사]] 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열흘 후에 "성첩을 지키던 병사들중에 얼어 죽은 자가 나왔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14_002|#]] 적은 계속 깔짝대서 상시 긴장해야하지, 눈, 비, 그도 아니면 [[진눈깨비|둘 다]] 내려서 옷 젖지, 얼어 죽을 날씨에 고작 가마니 따위나 줬다가 며칠만에 말 먹인답시고 뺏어가지, 척화파들은 전투에 나서지도 않으면서 결사항전만 외쳐대지.... 그 와중에 동료도 얼어 죽었으니 이정도면 전의를 생각할 게 아니라 정말 반란이 안 일어난 게 천운이었다. 12월 27일에는 이기남을 보내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전달했다.[* 적진을 살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옛 [[고구려]] 시절 [[대무신왕]]이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에 농성하던 중 신하 [[을두지]]의 계책으로 술과 생선을 가지고 화해를 청하자 한나라군은 성내의 물과 식량이 많은 줄 알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만]]책도 참고했을지도.] 하지만 [[홍타이지]]는 어차피 팔도의 물건이 내 손아귀에 있고 성내의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도로 가지고 가 굶주린 신민들에게 나누어주라며 비아냥거렸다. 적진을 떠보려던 게 오히려 적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줄줄이 꿰고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