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지연전에 들어가다 === ||[youtube(T1-MWeKB_xM)]|| 조선의 도원수였던 [[김자점]]도 청군의 이러한 빠른 작전 속도에 놀라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기병의 앞에 선발대 몇 기를 보내 길잡이로 삼아 [[황주목]]에 도착했는데, 이들이 황주를 지나가자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했다. 조금 후에 마푸타가 보낸 본군의 선발대 300명가량이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따라오는 본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김자점은 인조가 하사한 상방검을 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이완(1602)|이완]]은 김응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의 동생이다.]와 함께 마푸타 군을 산골짜기로 유인하였고 김자점 본군이 기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기병 1천 명이 [[황주목]]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이완은 어제의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을 알 것이라고 말했지만,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기습을 실행하지만 실패했다. 마침내 [[황주목]] 정방산성에 인조의 서신이 당도했다. 이에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때까지 김자점은 작계에 따라 동원령을 내려 정방산성을 5천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적의 남하를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청 선봉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남하한 선봉대는 몇 안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의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봉화를 막고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여하튼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SOS를 치자 김자점은 더 이상 정방산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군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12월 23일 [[황주목]]에 도착하였는데, 도르곤은 주변 주민들을 착생하여 김자점의 1만 5천(실제 5천)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르곤은 곧장 일부 병력을 떼어 추격하라 명했다. 사서에 따르면 김자점은 12월 24일 토산에 영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청군이 토산에 김자점의 군대가 있음을 눈치채어 이튿날 동틀 무렵 기습했다. 김자점 휘하 조선군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산위로 패퇴하였고, 다른 장교들도 자신의 휘하에 수십 명씩 이끌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어영청 포수들이 진지를 고수해서 청군을 물리쳤다거나 봉산군수 조후익만이 병력을 이끌고 반격하여 공을 약간 세웠다거나 하는 등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군이 다시 재정비하고 청군에게 반격하여 결과론적으로 토산 전투는 조선군이 이긴 듯하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이에 2천 군사를 수습하여 남하를 개시하고 12월 30일 양평 미원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했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김자점이 황해도에서 청군과 교전한 후, 싸우지 않고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의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요즘으로 치면 1번 국도상의 방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이나 정묘호란 때 후금군처럼 적의 산성을 일일이 점령하려 한다면 칩거와 농성이 의외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에서는 오직 수도를 향해 최대한 빨리 어택땅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청나라에게 좋은 일을 해준 격이었다.[* 이미 이 문제는 '''광해군이 예견했음에도 대책이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시절에 "쟤네들이 일본처럼 경로에 있는 성을 다 먹으면서 진군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냐? 성을 치지 않고 바로 수도로 진군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얼른 중도에서 막을 대책을 세워봐라." 하고 비변사에 얘기했지만, 비변사에서 내놓은 대책이란 "걍 강화도나 남한산성에 짱박혀서 사방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죠?"였다. 비변사 말대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각각 강화도, 남한산성에 들어갔지만 그 결과는 대실패로 끝났다. 비변사가 제시한 대책은 일단 중도에서 막지도, 수도를 지키지도 않고, 중앙은 아무것도 안 하는 채로 그저 지방에서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매우 허술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아군은 육전에 능하고 수전에 불리하니 배 같은 건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자는, 후손인 우리가 보기엔 이뭐병스러운 주장도 했지만, 지방에서 알아서 하라고는 안 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특정지역에 틀어박혀 농성만 한 게 아니라, 비록 의도는 불순했지만(명나라로 도주) 일본군을 피해 최대한 북쪽으로 도망쳤고, 그 덕분에 임진왜란이 장기화되어 일본군도 지쳤다. 차라리 당시 비변사가 일단 최대한 남쪽으로 도망쳐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최후의 수단으로 농성을 택하자고 했다면,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처럼 장기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실제 역사대로 비변사가 강화도나 남한산성에서 구원군을 기다리자고 했어도, 만약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려던 인조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쪽으로 가는 바람에 결국 남한산성 농성도 포기한 채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면, 강화도가 함락되더라도 인조는 한반도 남부 지방 병사들에게 보호를 받는 동시에 이들이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자기 아들들을 청군으로부터 구해주리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강화도 함락이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어 지치는 상황 또한 항복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말이다. 물론 남한산성에서 방어에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전쟁 직전에 광주목사 한명욱이 산성까지 물자와 곡식을 운반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며 평지에 지어서 식량을 얼마 가져오지 못한 청군의 식량이 풍족해지고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군의 식량이 부족해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인조 정권은 조괄이 명장으로 보일 지경으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본 상식조차 없던 집단인 것.] 급보를 접한 인조는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반, 무반과 그 가족들 그리고 종묘사직의 위패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청군 선발대가 서대문 근처 홍제원[*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이다.]까지 도착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고, 결국 인조는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참고로 아래에 있는 문서는 [[청태종]]이 인조와 조선 백성들에게 각각 보낸 것이다. ① [[인조]]에게 보낸 문서.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諭示)[* 타일러 가르침.]한다. >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우량카이]](兀良哈)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바쳤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호란|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에게 벌을 내린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들에게 글을 보내 사세(事勢)[* 일이 진행되는 형편.]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나서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려 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강화도]])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 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臣)이라 일컬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背逆)[* 은혜를 저버리고 거스름.]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 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달게 여긴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겠느냐. >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라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 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밖의 사소한 것들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인조]]에게 보낸 이 문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고, 병자록과 청나라 실록에만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인조와 신료들이 이 문서를 받고 열받아서 길길이 뛰는 내용은 또 있다. ②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청나라|대청국]](大淸國)의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 >짐은 그대들의 나라와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들의 나라가 기미년(1619)에 [[사르후 전투|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들의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들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호란|정묘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들의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들의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들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들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들의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 사신이 그대들의 국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들의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호란|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짐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들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들 모두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37년 1월 2일. 이후 각지에서 방어하려 했던 조선군이 황급히 한성으로 집결해 근왕을 하거나 평지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대부분은 청군보다 움직임이 한참 늦었으며, 거기에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중과부적으로 패하거나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 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를 알고 싶다면 [[청야전술|이 문서]]에 들어가 보자. 그만큼 아무리 현지가 곡창지대거나 물류의 유통지인 대도시라고 해도, [[청야전술]] 등의 전술을 사용하면 그냥 굶으면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의지로 싸우면 된다고 하면 병사의 사기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정도로 떨어진다.] 일단 [[내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나라]]가 있었으며[* 다만 명나라는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에게 참패하여 정예병 다수를 잃은데다 남은 정예병들마저 수비에 치중하거나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는데 투입된 상황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내몽골의 몽골인과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오직 "왕"을 잡기 위해 다른 지역들은 최대한 건들지도 않고 수도에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면 청군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전략이었다. 물론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이나 [[여요전쟁]] 때의 [[성종(요)|요성종]],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정작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청군의 진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애당초 농성(籠城)에 들어간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략적으로 기동할 수 있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수전쟁, 여요전쟁 같은 전략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다.[* 여수전쟁, 여요전쟁 때는 농성군이 적군을 묶으면서 버티는 틈을 타 집결한 야전군이 [[살수대첩|후퇴하는]] [[귀주대첩|적의 뒷덜미를 후려쳐]] 결국 승기를 잡아냈다. 또한 임진왜란, 정묘호란 때도 관군이 농성하는 동안 의병이 야전군의 역할을 해 각각 일본군과 후금군의 보급선을 기습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