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청군의 하북원정 (1636년 여름~가을) === >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의 조서를 아시다르한 낰추와 히퍼 등에 내린다. > > 회맹에 모인 지역의 여러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모든 버이러들로 향하여 말할 말이다! > > '''지금 얼음 맺히면 곧바로 [[전쟁|(조선으로) 출병한다.]]''' > > 이 사이에 모든 사람은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에 고두하러 가는 것을, 고두하러 보내는 것을, > > 또 친척으로 대하며 오는 것을 모두 "멈춰라!"하며 멈추게 하라! > > 이 말을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의 조서!" 하며 말하지 말아라! > > "너희의 뜻으로!" 하며 말하라! > > '''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까닭은 우리 내부의 나라의 식량 손해를 보았다.''' > > '''식량 분배하며 먹일 호구 많다!''' > > '''고두하며 올 사람의 말에 식량 먹이면 견디지 못한다!''' > > 그와같이 되어서 멈춰라! 한다. > > 이 글을 너희 사람에 들리게 하지 않고 조용히 보고서 숨기며 보관하라!> >----- > - 만문노당 1636년 10월 16일 기사中 [[https://cafe.naver.com/booheong/163569|출처]] 청나라는 조선측의 군신관계 요구 거부 및 적대행위에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지만 약 열 달동안은 다른 곳을 공략하느라고 조선측을 내버려두었다. 용골대가 도망치듯이 되돌아 온 것은 1636년 봄인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거의 10개월간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최명길 등의 주화파들의 주장처럼 조선 조정이 현실을 보고 청나라를 잘 달랬으면 참화를 겪지는 않았을테지만 위에서 나온 대로 조선 조정은 이 황금같은 기간을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은채 흘려버렸다. 청나라는 그동안 조선은 놔 두고 명나라 서부의 농민반란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5~9월에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하북 지역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군 주력은 섬서성에서 농민반란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에[* 이때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가 [[자오곡 대책]]을 실행해 [[시안시|서안]]을 급습하려던 고영상의 10만 농민 반란군을 포착해 섬멸했고, 반란군은 고영상의 부하인 [[이자성]] 및 몇기만 도망갈 수 있었다. 이후 이자성은 고영상을 대신해 반란군을 이끌게 된다.] 청나라군은 무인지경으로 하북지역을 쑥대밭을 만들고 심양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청나라군 주력은 하북 원정에서 귀환한 후에 3달간 휴식을 취할 겸 12월 압록강이 얼어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씨가 추워져 기병의 도하가 용이해지자 바로 조선 침공을 개시했다. 청나라는 인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하북에서 명나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와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시켰다. 그런데 수만명의 포로가 갑자기 만주에 이주하게 되니 식량이 빠르게 감소하게 되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63569|병자호란 직전 심각한 청나라의 식량 사정]] 그리하여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대략 15일~20일치의 군량만 준비하였다. 즉 청나라는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작정이었다. [[http://gil092003.egloos.com/9985015|청나라군이 휴대한 군량은 1달 미만]] 일부 역덕들이 이를 들어 청나라가 전쟁준비에 소홀했다거나 식량이 모자랐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원래 기병이 주력인 청나라군은 많은 군량을 휴대하지 않았고, 본거지 심양 주변에 팔기군을 주둔시켰다가 공세에 들어갈 때 소량의 군량을 휴대해 전선에 나가고 여의치 않으면 돌아오는 형식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그렇지만, [[정묘호란]]과 [[영원성 전투]]만 하더라도 한달 이내의 작전기간을 정해두고, 작전목표가 불분명해지거나, 장기전으로 흘러 식량이 바닥날 것 같으면 바로 물러섰으니 이것이 청나라 사정이 나빴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청은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동로군 8,500명, 본군 8,600명, 후미군 12,900명, 기타 11,000명(쿠툴러로 정규군을 보조하는 하인들이다. 모두 포로가 된 한인들이 맡았다.) 등 총 4만 5천여 명의 침공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