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발 (문단 편집) === 신해혁명 이후 ===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우한]]에서 봉기한 혁명군은 점령한 도시마다 변발을 잘라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청나라가 정식으로 망하면서, 1912년 3월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오른 [[쑨원]]은 변발, 호복 금지령을 내렸다. 여담이지만 이때, 청나라 호복을 금지하면서 권장 복식으로 [[인민복]]의 원형이 나온다.[* 인민복을 마오쩌둥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원조는 [[쑨원]]이다.] 하지만 막상 변발금지령이 나오자 약 300년간 실행되었던 변발을 이제는 중국의 전통으로 여기는 풍조도 있어서 이번에는 변발령 때와는 정반대의 저항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관리가 가위를 들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변발한 사람을 보면, 이를 잘라버리는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북방민족에 동화된 일부 지식인들과 변발이 전통 한족의 풍습이 아니란 걸 몰랐던 일반인들이 '변발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것이므로 자를 수 없다'면서 반발했다고 한다. 변발금지령은 실시되었으나, 청나라의 변발령처럼 사형으로 다스린 것은 아니고, 단속나온 관리가 거리에서 눈에 띈 변발을 잘라버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학자들[* [[캉유웨이]]나 구홍명 등의 유학자들은 변발을 죽을 때까지 하고 다녔다.]이나 왕정복고파들은 변발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청나라의 지지세력이 많던 북경에서는 청나라가 망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어도 변발이 꽤 많았던 듯 하다. 1920년대 북경 거리 사진을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변발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8306677/Fascinating-colourised-video-shows-residents-Beijing-1920s.html|#]] 하지만, 순식간에 지배계급에서 밀려난 만주족들은 한족의 학살을 피해 헤어스타일로 민족구분이 될 수 있는 변발을 잘라버렸고, 심지어는 마지막 만주족 황제였던 [[선통제|푸이]]조차도 자금성에서 추방되면서 변발을 잘라버리고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했다. 친청 성향 한족들 중에서도 일부는 신해혁명에 가담했던 반청 성향 한족들에 의한 탄압을 피해 변발을 자르는 경우가 있었다. 1917년 [[장훈복벽]]으로 12일 간 청나라가 복고되었을 때는 변발의무가 폐지되어 신민의 자유에 맡긴다고 포고하기도 했는데 12일 동안이니 의미는 없고... 극단적인 경우 원래 한족의 상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파일:attachment/Byeonbal2.jpg]] 오늘날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전통 한족의 문화는 아닌데다가 비주얼적으로도 좀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변발을 비난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변발 같은 유목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전통 한족의 모습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한족 민족주의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절대 치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자민족의 헤어가 아닌 오랑캐의 헤어가 한족의 것으로 외국에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