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벽화 (문단 편집) === 고대의 벽화 ===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벽에 그림을 그려왔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고 있다. 동굴 벽화에는 주로 [[동물]]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을 숭배하거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그렸을 거라고 추측한다. 혹은 그려놓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에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그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선사시대]] 벽화를 보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동물들이 무엇이 있었는지, 원시인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구석기 시대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구려 고분군|고구려 고분벽화]], [[백제]], [[발해]]의 [[왕릉(무덤)|왕릉]]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한국의 고분벽화는 대부분 고구려나, 혹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나 신라 영역에 있더라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을만한 국경지대에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구려는 무덤 벽에 이것저것 많이 그려놓은 편. 백제는 무덤 구조가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백제 고분 중 그나마 벽화가 있는 것도 고구려 벽화처럼 이것저것 많이 그려넣지는 않는 편이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초~중기 고분은 구조가 달라 벽화가 없다. 무덤 안에 '방'이 있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과 부장품을 나무로 된 널에 넣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널이 썩어 없어지면서 돌이 무덤 안을 빈틈없이 가득 파묻어 채우는 형태라 벽화를 그릴 벽이 없기 때문이다.[* 벽화는 없지만 이 덕분에 유물들이 엄청난 양의 돌무지에 파묻히게 되므로 [[도굴]]이 어려워,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이미 옛날에 다 도굴당해서 무덤 속이 벽화만 빼고는 텅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신라 무덤은 껴묻거리가 보존된 경우가 많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금관]]이나 허리띠 같은 것도 무덤의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현대까지 남은 덕분이다.] 신라시대 그림으로 유명한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는 벽화가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덮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이다. 각종 시험에서 여러 보기 중 고구려 벽화 사이에 벽화가 아닌 천마도를 은근슬쩍 끼워넣는 낚시 문제가 자주 나온다. 그러다 신라 후기에 들어서 묘제가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면서 일부 고분에서 벽화의 희미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영주시]] 순흥 어숙묘나[* 영주는 경상도 최북단으로 고구려 전성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다. 즉 양국의 접경지역으로 서로의 문화적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영주 안에는 또다른 벽화고분인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도 있지만, 순흥 읍내리 고분은 고구려계 고분이고 이 어숙묘는 (고구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더라도) 신라 고분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주시]]의 [[배동 삼릉]]은 벽면을 채색한 흔적이나 희미하게 그려진 연화무늬나 인물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권에서도 [[대가야]]가 위치했던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연꽃무늬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가야 고분벽화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