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민 (문단 편집) ===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대립 === [[미국]]은 마지못해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으로 이어진 흐름 등을 보며 '[[도미노 이론]]'을 우려했다. 남 베트남이 무너질 경우, 동남아 전체가 차례차례 공산화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국 유럽과 미국에까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봤다. 미국은 남베트남 군에게 장비를 원조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식민지로서의 베트남은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독립된 국가로써의 남베트남은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이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을 바라보고 있던 시각을 대표했다. 남베트남은 미국과 프랑스, 남베트남 정부 3자의 이해관계가 얽혔다. 형식적으로는 친불정부 [[베트남국]]의 황제 [[바오다이]]가 수반으로 있었는데, 바오다이는 가족이 베트민에게 죽은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한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응오딘지엠을 안좋아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며 남베트남 군부 내의 친프랑스 인사들, 프랑스가 지원하는 [[정치깡패]] 등을 일소해버리며 정권을 장악하였고, 미국도 응오딘지엠을 지지했다. 결국 프랑스는 남베트남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미국과도 척지게 되자 남 베트남을 포기하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바오다이는 폐위되고, 1955년에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때 남베트남의 단독선거로 인해 [[유엔]]은 훗날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55년~59년 동안의 토벌이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쪽 베트민이라고 떳떳할 건 하나도 없어서, 응오딘지엠 정권 인사들을 상대로 투쟁하는 게 아니라, 정권과는 상관없는 각 시골 유지들, 즉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기 [[https://apps.dtic.mil/sti/pdfs/AD0870240.pdf|시작했다]]. 호치민이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자극하길 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애초에 이런 미치광이 테러범들을 지원하는 것 자체도 남베트남에 대한 명백한 도발행위였기에, 호치민이 과연 미국을 자극할 의도가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실, 남쪽 베트민의 테러는 호치민과 공산당이 그들을 지원하고 지령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과격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여하튼 59년부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이 남베트남을 무력 통일할 것을 결의하고 남쪽 베트민을 지원함에 따라 베트민은 더더욱 잔혹해져서 아이들까지 의도적으로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날뛰기 시작했고,[* [[https://play.google.com/store/books/details?id=AmfDvrjX4EgC&rdid=book-AmfDvrjX4EgC&rdot=1]] [[https://gall.dcinside.com/m/war/1310756]] [[https://gall.dcinside.com/m/war/1311933]] ] 이듬해는 급기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공식 결성되면서 남쪽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더더욱 그 기세를 더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서 베트민과 미국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노력, 미국이 남 베트남을 수호하려는 노력은 충돌하면서 미국이 직접 남베트남에 파병하게 되고, 결국 [[베트남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