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민 (문단 편집) ===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분단 === 1946년부터 프랑스군과 베트민 사이에 [[인도차이나 전쟁#s-3|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다. 베트민의 정치가이자 지휘관이었던 보응우옌잡은 베트민 병력 10,000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베트민은 어디까지나 급조된 [[민병대]] 수준의 조직이었고, 프랑스 군의 화력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6년 11월 프랑스군의 함포사격에서 시작된 하이퐁 전투에서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렸었다.] 베트민은 [[유격전]]을 벌여 한밤중에 프랑스군을 기습하거나 철도를 폭파하는 식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1946년 하노이와 하이퐁에서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려난 베트민군은 정글로 도주했고, 1949년까지는 유격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섰다. 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 지역에서의 상황은 프랑스군이 유리했으나, 주변국들의 상황은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은 베트민에게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소련 역시 베트민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베트민의 화력은 나날이 늘어났고,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으로[* 이때 노획한 국민당군의 미국제 무기가 베트민군에게 넘어갔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한 화력도 미국제 곡사포였다.]중무장한 진짜 군대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49년말-1950년초에는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의 국경초소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야전에서 프랑스군과 첫 전투를 치뤘다. 베트민군은 1950년-51년을 거치며 야전에서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치뤘고, 프랑스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귀중한 승리를 가져오며 라오스와의 국경지대, 중국과의 접경지대의 대다수를 장악했다. 한편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드라트르 장군이 1950년말부터 건설한 요새인 드라트르 라인이 세워지고, 프랑스군이 재정비후 참호에 틀어박혀 화력으로 베트민군의 돌격을 분쇄하는 ‘고슴도치 전술’이 채택되자 베트민군도 고전하기 시작했다. 1951년에는 하노이와 하이퐁 함락을 노리고 3-4개 사단이 공격해오다가 홍강삼작주 일대에서 참호를 파고 버틴 1개 사단 규모의 프랑스군에게 작살나고, 1952년초까지의 공방전에서 베트민군은 역으로 자신들의 점령지가 공격받기 시작하는등, 프랑스군은 잠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드라트르 장군의 사망 이후 전황은 프랑스군에게 불리해져 갔다. 베트민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직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며 죽였고, 이는 친 프랑스 계열 베트남인에게 대한 습격과 함께 공산주의자가 아닌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프랑스는 베트민군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고 있었지만, 인명피해가 누적되고, 미국의 지원마저 줄어들자 점점 전쟁의 값을 견디지 못하고 피로가 누적되었다. 베트민은 프랑스 군보다 더 피해가 컸지만, 이들에게 조국의 독립은 포기할 수 없는 것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베트남은 조국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1953년, 파리는 1955-56년안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철수하고자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해에 일어난 나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인 화력 압도, 고지대 점령을 하고 참호를 파 베트민군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박살내는 ‘고슴도치 전술’을 대규모로 실행하는 ‘카스토르 작전’이 시행된다. 베트민의 주력부대를 묶어놓고, 보급로를 차단하며 화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찾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의 국경지대에 있어 보급로를 차단하고 베트민군 주력을 섬멸할 수 있는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 [[분지]]에 [[요새]]를 건설한다. 디엔비엔푸에는 포장도로가 한 개밖에 없었고, 고지대를 장악하면 베트민군의 보급로는 차단될 수 있었다. 아직 프랑스군은 전면전에 자신이 있었고, 베트민의 병력을 끌여들여 화력으로 섬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보응우옌잡]]은 프랑스 군이 제 목을 조른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베트민은 여성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력[* 민간인과 민병대 25만명, 야전 병력 5만명]과 장비를 동원하여 프랑스 요새를 둘러싼 산지 위에 화포를 올려놓고 매복해 있었다. 하지만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에게 기만 작전을 펼치기 위해 1954년초까지 프랑스군에게 간헐적인 포격외에는 공격을 안하고 숨어있었다. 베트민은 5개 사단 규모인 5만명으로 프랑스군 정예 병력 14,000명을 포위했지만 프랑스군은 공중 정찰까지 감행했음에도 베트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개시된 베트민군의 공세로 1954년 3월부터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은 프랑스군의 고지대 진지를 점령하고 산 위에서 포격하기 시작했다. 3월 중순에 [[비행장]]을 파괴당한 프랑스군은 공중에서 투하하는 보급과 공수부대 증원을 받으며 5월 7일까지 버텼지만 결국 막대한 피해[* 전사자만 2,000명이 넘고 포로가 11,000여명이었다.]를 입고 베트민에게 항복한다. 사실 베트민의 피해는 프랑스군의 배에[* 전투 병력의 절반이 사상당했다. 25,000-26,000명 정도.]이르렀고,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했다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의 지원 없이 베트민 단독으로 남쪽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낼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중국은 [[6.25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라 더 이상 베트남 쪽에서 전쟁을 지원하기는 싫었고, 소련 역시 거리가 먼 나라였고 적극적으로 베트민을 도와줄 경우 서방, 특히 미국을 자극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주둔군의 최정예 병력인 외인부대원들, 식민지 공수부대등의 손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들의 손실은 곧 프랑스군 전투 병력의 대다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맺어진 제네바 조약을 통해, 북베트남은 베트민의 지배로 독립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되었고, 남베트남은 프랑스의 점령지로 남게 되었으며, [[유엔]]을 통해 2-3년 후에 전 베트남의 통합 선거를 하기로 약속했다. 이대로 가면 호치민이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현상유지를 바랬던 미국의 개입으로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이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이 벌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