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역사 (문단 편집) === 통일 이후의 베트남사(캄보디아 침공, 중국-베트남 전쟁, 1979년 - 1988년) ===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충만해진 베트남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공산화, 지배하여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19세기에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과 함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베트남은[* 그나마 [[태국]]은 [[캄보디아]]와 유사한 종교와 문화로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동형화가 되었지만, 베트남은 종교([[대승불교]])와 문화의 이질성이 더 크고, 19세기 초에는 아예 꼭두각시 국왕을 세워 완전히 동화시키려 했다. 이 결과로 캄보디아 내에서 강제동화정책에 반발해 [[1851년]]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막 공산화된 캄보디아 정권과 당초엔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고 있던 [[크메르 루주]]는 원래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로 성장했고, 그 보답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베트남을 돕고 있었지만, 1972년 미군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자, 크메르 루주는 곧바로 미래에 다가올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3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중화인민공화국|중공]]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과거 자신들의 고토를 내놓으라며 베트남과의 국경에서 국지전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사실 현재 베트남 2대도시 [[호찌민시|호찌민]]도 본래 캄보디아의 영역이었다.(…) 16세기 이후 크메르 왕국의 끊임없는 쇠퇴와 베트남 리 왕조의 남진으로 동부지방을 잃고 해양 상업도 쇠퇴하기 시작했지만.]1976년부터는 캄보디아의 요청을 받은 중국이 직접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크메르 루주의 친 중공 정책으로의 선회와 남부지역 공격에 마침내, 1978년 12월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무력 침공했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했다. 그러자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2월 17일 ~ 1988년 1월)이 벌어졌다.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의 대분열을 상징하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명목상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결국 모두 지친 가운데,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물러났고, 역시 중국도 베트남에서 물러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 루주]]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훨씬 안 좋은 데다가 크메르 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 전쟁에서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다.[* 단순히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있지만 상당수 보트피플은 공장이나 농장, 어선에서 일해도 봉급이 얼마 안나왔고 인플레이션 현상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의 가치는 더더욱 떨어지는 현상 때문에 돈을 거하게 벌려고 베트남을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의 보트피플은 대다수가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면, 1980년대의 [[보트피플]]들은 대다수가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현재도 두뇌 유출은 베트남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다.] 그러나 1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쳐 [[1986년]] 말에 공산당은 6차 인민회의에서 [[도이머이]] (Đổi mới; 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을 승인 후 실시했고, 1989년에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 이웃 국가인 중국이 태자당을 비롯한 중앙당의 권력남용이나 부정부패 문제가 있다면 베트남은 반대로 지역당 간부들을 비롯한 지방 토호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국부인 호찌민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시키면서 중앙당과 중앙정부에 지역당과 지방 유력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해지는 바람에 각종 선거나 당 대회가 있을 때마다 지방 유지들 간에 기싸움이나 뇌믈 공세가 판을 친다고 한다.] 도이모이 추진 후 1990년대 초반 들어 한국 등 주변국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한편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정식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적국이던 미국과도 관계 개선에 주력해 1995년 통상금지가 풀려 외교 관계가 재개됐고 이제는 한술 더떠서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면서 미군도 주둔하고 있고 합동군사훈련도 자주 여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