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역사 (문단 편집) === [[베트남 독립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과 제네바 평화 협정 ===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됐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한편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으며,[*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화민국군이 남부를 지배했다고 잘못 표기되었다.]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며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 및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 1개 특구 양보, 인도네시아 주재 화교의 지위 회복 등을 전제로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맺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했다. 반면 남부 측은 영국군은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제 무기를 넘겨주고, 별다른 마찰없이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 나라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1946년 3월, [[베트민]]과의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눈속임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4공화국 시기 공산당은 정권에서 배제당하는 야당 신세였다.]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의 각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기타 요충지를 습격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1947년 2월에 중부의 다낭, 후에 지역에 상륙했다. [[파일:Flag_of_Republic_of_Cochinchina_(variant).svg.png|width=120]]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 자치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 남기국(南圻國)이라고도 한다.]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 완문청)이 총리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E4%BF%9D%E5%A4%A7%E7%9A%87%E5%B8%9D_%E5%9D%90%E5%83%8F.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o_Dai_1953.jpg]] 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nite&logId=5318262|#]]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과 [[자동차]]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찌민|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에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 바오다이는 공화국화 되면서 퇴위된 후 [[프랑스]]로 망명해 조용히 살다가 1997년에 [[파리(프랑스)|파리]]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향년 84세)]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으로 '[[베트남국]]'[* 베트남준국가라고도 한다.]이 성립됐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1956년 7월에 남북총선거로 통일 베트남을 세우기로 했다.]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16도선[* 이 경계선대로라면 [[후에]]와 [[다낭]]은 베트민이 가질 수 있다.]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남북분단|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width=120]] '''[[베트남국]](quoc gia Viet Nam, 꾸옥 기아 비엣남) 국기'''이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비엣남 꽁호아) 국기''' [[1948년]] [[6월 2일]]부터 [[1975년]] [[4월 30일]] 패망때까지 사용. '''꺼방바속도(Cờ vàng ba sọc đỏ''', 한역하면 주황삼선기朱黃三線旗''')''' 노란색은 베트남과 베트남인, 빨간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상징하며, 민유 민치 민향民有 民治 民享([[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삼민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뒤에 붙은 것으로 원래는 '''[[성태제|타인타이 황제]]'''(成泰帝/성태제)'''의 깃발'''로 [[계정제|카이딘 황제]](啓定帝)가 고친 1920년까지 썼다. 카이딘 황제의 기도 롱띤이라고 부른다. 바오다이 황제 때까지, 즉 1920년부터 1945년까지 [[http://www.worldstatesmen.org/vn_1920.gif?width=120|사용했다.]] 사실상 [[1890년]]부터 1975년까지 85년을 이어진 국기인 셈이고, 지금도 남베트남계 혹은 베트남 공산정권 반대 세력에선 이 국기를 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