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자 (문단 편집) === 재건과 파괴 === [[파일:튀니지 베자.jpg|width=800]]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설한 시타델 기원전 46 ~ 25년에 걸쳐 누미디아가 로마에 흡수된 후 도시는 재건되어 바가 (Vaga)로 불리게 되었고, 전략적 입지 덕에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기원전 14년에는 옛 카르타고 시절 성채를 파괴하고 22개의 성탑을 갖춘 로마식 성채를 세웠다. 또한 시가지를 두르는 성벽 역시 세워졌고, 현재까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서기 105년 [[트라야누스]]부터 [[하드리아누스]]의 치세까지 25년에 걸쳐 인근 협곡에 로마식 다리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200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바가를 식민도시로 승격시켜 '콜로니아 셉티미아 바가'로 명명하였다. 그 후로도 주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영하던 도시는 430년대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 왕국]]의 북아프리카 정복 당시 [[히포 레기우스]]와 함께 파괴되었다. 442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공식적으로 반달 족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로마군의 반격을 우려한 가이세리크는 448년 바가의 성채를 비롯한 방어 시설을 허물었다. 한세기간 폐허로 남았던 도시는 534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반달 왕국이 멸망한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는 관료 파울로스를 파견해 파괴된 성채와 시가지를 재건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시가지를 확장하였다. 또한 일대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전과 같은 위상을 회복하니, 현지인들은 황제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황후 [[테오도라(6세기)|테오도라]]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리아스 (Theodorias)를 지명으로 삼았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바가는 아랍식인 바자로 명명되었고, 성채는 태수의 거처인 카스바로 불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