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자 (문단 편집) == 역사 == 카르타고가 세워지기 전부터 베르베르계 아브리가 부족의 마을이 있었고, 점차 [[페니키아]] 인들이 왕래하며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후 일대를 지배하게 된 [[카르타고]]는 현재의 카스바 자리에 성채를 세우고 수비대를 배치하여 [[누미디아]] 방면 방어 요새로 삼았다. 와가 혹은 바카라 불린 도시는 [[포에니 전쟁]] 당시에 카르타고의 주요 내륙 거점 중 하나로써 기원전 218년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에 정예 병력을 파병하였고, 이후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합류하러 동진하던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군을 격퇴하였다. 승전 후 로마는 동맹 마시니사에게 참전의 대가로 경쟁자 시팍스의 영토에 더하여 바카의 지배권 역시 주었으나 명목상에 불과하여, 도시는 여전히 카르타고령이었고 그 수비대가 주둔하였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에야 바카는 온전히 누미디아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멀지 않은 관계로 점차 로마인들이 정착하였다. 로마인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무렵 바카는 누미디아에서 가장 부유한 보급창이자 활발한 상업 중심지였다 한다. 기원전 118년, 마시니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킵사]] 왕이 사망하자 누미디아는 그의 두 아들들과 조카 [[유구르타]] 사이에 분할되었다. 세 군주 간의 내전 끝에 동부의 바가에 기반했던 유구르타가 로마의 중재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과정에서 친로마 군주 [[아드헤르발]]과 로마 정착민들이 살해되며 로마와 분쟁이 일자 유구르타는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베스티아를 매수하여 평화 협정을 맺었고, 후자는 재무관 섹스티우스를 바카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111년) 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협정 비준을 거부하고 법무관 루시우스 카시우스를 바카로 파견하여 유구르타를 로마로 초청하여 재판하였다. 이어진 공방에서 그의 뇌물 혐의가 드러나자 기원전 109년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로마군이 파견되며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