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궁 (문단 편집) === 조선 후기 인식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등의 영향이 있었고, 반정 세력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법궁"이라는 검색어로 광해군 시대를 살펴보면, 법궁이라는 용어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창덕궁을 법궁이라고 하면서도 경복궁을 또 법궁이라고 하는 기록도 다수인 데다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완료하고 난 후에도 수선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궁인 법궁의 재건을 위해 10년을 목표로 목재와 청기와를 차근히 준비하라는 광해군의 지시가 있기도 하다. 거기에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에 관련된 상소문이 실린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1618) 1월 29일자 8번째 기사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은 법궁입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광해군 시대에는 법궁이 창덕궁, 경복궁, 경운궁 이렇게 3곳이나 되는 모순점이 발견이 된다. 왕궁에서 생활을 직접적으로 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의 왕실과 황실의 생활 및 관련용어들의 본래 뜻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용어 '법궁'과 '정궁'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를 찾아보면,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국역 조선왕조실록의 각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주에서 법궁=정궁 또는 정궁=법궁 이라고 처리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version=7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