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번진 (문단 편집) === [[당현종]] 시기 === [[당현종]] 시기는 절도사직이 등장한 시기이며, 가장 유명한 절도사직은 대부분 이때를 창설 시기로 한다. 보통 이때 절도사직이 10개 창설되었다고 하는데, 문헌에 따라서는 절도사직은 8개, 또는 9개이며 하나 또는 둘 정도는 절도사직보다 급이 낮은 경략사였다는 말도 있다. 이들 10절도사직의 창설 시기와 병력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상황에 따라 병력이동과 증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각각의 절도사들의 전력 구성과 임무, 창설시기, [[안사의 난]] 당시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 * [[안서절도사]] - 710년 창설, 대[[서돌궐]], 2만 4천 명, [[말(동물)|말]] 2700필, [[봉상청]][* 초대 절도사는 [[고선지]]였다. 봉상청은 그의 부하 겸 후임이다.] * [[북정절도사]] - 712년 창설, 대[[돌기시]], 2만 명, 말 5천 필, 봉상청(북정도호)[* 봉상청이 무고로 죽고 [[이사업]]이 계승했다.] * [[하서절도사]] - 710년 창설, 돌궐과 [[토번]]의 연계 단절, 7만 3천 명, 말 7900필, [[가서한]][* [[난주]] 지역으로, 776년 [[토번]]에게 정복됨.] * [[삭방절도사]] - 721년 창설, 대돌궐, 6만 4700명, 말 1만 3300필, [[안사순]](안록산의 혈족) * [[하동절도사]] - 711년 창설, 대돌궐, 5만 5천 명, 말 1만 4800필, [[안록산]] * [[범양절도사]] - 713년 창설, 대[[거란]], [[해족|해]], 9만 1400명, 말 6500필, 안록산 * [[평로절도사]] - 719년 창설, 대[[말갈]], [[발해]], [[실위]], 3만 7500명, 말 5500필, 안록산 * [[농우절도사]] - 713년 창설, 대토번, 7만 5천 명, 말 1만 필, [[가서한]] * [[검남절도사]] - 714년 창설, 대토번, [[남조(왕국)|남조]] 3만 900명, 말 2천 필[* 지금의 [[쓰촨 성|사천]](쓰촨)지역에 해당하며 [[안사의 난]] 당시 [[당현종]]이 피난을 왔던 곳으로, 당의 최후의 보루였다.] * [[영남절도사]](또는 경략사) - 711년 창설, 대이료([[남만]]계), 1만 5400명, 말 0필 이 중 [[만리장성|장성]] 밖에 안서, 북정, 평로번진이 존재했으며, 나머지 지역은 장성 안에 위치했다. 그러나 장성 안의 번진도 국경선쪽에 주로 위치해 있으며, 장성 외부지역까지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일종의 이중방어선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이들의 지휘를 받는 병력이 거진 44만~47만에 달해 당의 군사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장성 밖의 절수직(절도사)은 [[무관]]들을, 장성 안의 절수직은 [[문관]]들을 임명하였고, 특히 장성 내 절수직은 [[재상]]으로 오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관직 코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천보]] 연간에 경쟁자의 등장을 반기지 않은 [[이림보]]에 의해 내지절도사, 즉 [[만리장성|장성]] 안쪽의 [[절도사]]직에도 [[무관]]들을 기용하도록 변화하면서 장성 내 절수직에도 무관직이 임명되고, 이민족이 유달리 많았던 당나라 군대 특성상 이민족들이 이런 장성 내 절수직에 올라가기도 했다. 또한 당현종은 후에 '사해를 삼킬 뜻이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대외팽창적 정책기조를 취한 황제였다.그에 따라 지휘관 한 명이 다수의 절도사직[* 보통 '절수직'이라고도 한다.]을 차지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유능해 보이는 장수 한 명에게 병력을 몰빵해준 것이다. 이런 사례 중 최초는 무려 4개 절수직을 혼자 아울렀던[* 그것도 삭방, 하동, 하서, 농우절도사였다. 가서한과 안록산을 합친 규모로 동원 가능 병력이 27만에 육박한다. 병력이 주둔한 주만 합쳐도 15개. 그것도 당의 서북방 전 지역에 걸처져 있다. 채방사 직도 여럿 겸해 실질적인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왕충사였고, 이후 가서한[* 하서, 농우절도사직을 겸직했다.]과 안록산[* 범양, 평로, 하동절도사직을 겸직했다.] 등 절도사직 겸직 사례가 여럿 나왔다. 이러한 절도사직 겸직은 당의 군사적 방위 필요성과 당현종의 야심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절도사 임기(규정 2년)를 한참 넘겨가면서 관할 구역을 맡기는 사례가 증가한다. 이는 일개 개인의 손안에 해당 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권한은 물론 정규군의 상당수를 임의로 무한정 맡기는 것이라 매우 위험하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안사의 난]]이 촉발되는 최대의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