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번진 (문단 편집) === [[당헌종]]([[원화중흥]]) 시기 === 당의 삼대 [[명군]]을 꼽는다면 [[당태종]], [[당현종]]과 함께 비중은 떨어지지만 [[당헌종]](805~820)이 손꼽힌다. 당제국의 권위와 존속을 위협하던 이런 반항적인 번진들에 대한 토벌에 들어가 당덕종 시기에 실시한 [[양세법]]을 철저히 하여 국고를 채우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금군]]을 양성[* 신책군이라 한다.]하여 하북삼진과 평로치청번진을 토벌, 가장 반항적이고 강성하던 평로치청번진을 확실히 제압하고 하북삼진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일단락되는 [[그러나 이 사진이|듯 했다.]] 당헌종은 강력한 금군을 육성하여 모든 번진들을 제패하고 대부분 지역을 다시 당의 통제 하에 넣었다. 그렇기에 그의 통치는 '[[원화중흥]]' 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원화중흥을 상징하는 것은 807년 작성된 <원화국계부>와 813년 작성된 <원화군현도지>이다. <원화국계부> 당시에는 당의 명령에 불응하여 호구 수를 보고하지 않던 7개 번진이 7년 후에는 노룡번진과 평로치청번진을 제외하면 모두 호구 수를 보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평로치청번진이 초토회되는 819년 시점에서 당은 일시적으로 전 국토를 통제하였다. 이는 두 번에 걸친 번진제도개혁에 성공한 덕이었다. 이 시기 양세법으로 거두어 들인 조세는 [[현(행정구역)|현]], 주 번진 등 각급 통치기관에서 먼저 경비를 떼고 남은 것을 직속 상급 통치기관으로 보내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주에서는 유주(留州)라는 이름으로, 번진에서는 송사(送使)라는 이름으로 경비를 제하고, 조정에 올리는 상공(相供)은 그 나머지에 해당했다. 또한 양세법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과중한 부담이 되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처음에 양세법 도입 당시 당 조정은 상공물품([[공물]])의 가격을 시가보다 높게 책정했는데, 각각의 번진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상공의 현물가격은 싸게 후려치고 상공물품의 가격은 높게 책정해 받으면서 차액을 착복하였다. 809년, 즉위 직후 절도사들의 반란을 몇 차례 진압하면서 자신감이 붙은 당헌종은 첫 번째 번진개혁에 들어갔다. 이는 양세법의 개혁과도 동일했다. 당헌종은 개혁을 통해 회부에서의 상공은 아예 면제하고, 대신 지군에서의 송사를 폐지해 각주의 필요경비인 유주를 제외한 모든 액수를 상공으로 했다. 이는 지군과 중앙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신 지군과 회부의 관계를 약화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주를 관할하는 대번진일수록 번진의 핵심 주였던 회부가 호수도 많고 부유했다고 해도 지군 전체에 비하면 그 영역도 적고 호수도 적은 경우가 보통이었기에 대번진들은 막대한 재정 손실을 입었고, 당 조정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다. 또한 상공의 현물가격을 시가에 맞춰 받음으로써 차액을 활용해 이득을 챙기던 것을 막는다. 이러한 개혁은 당 조정 측이 반항하는 번진을 토벌하던 토벌전을 시작하면서부터 행해졌고, 토벌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개혁 범위가 확대되었다. 819년, 번진 토벌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무렵 당헌종은 2차 개혁에 들어갔다. 이는 재정부분에 손을 댄 1차개혁과는 달리 번진의 핵심 유지기반인 군권에 손을 댄 것이었다. 당헌종은 2차 개혁을 통해 각 주의 장관들에게 해당지역의 관건병 및 단련병들의 지휘권을 주고, 절도사들에게는 직접적인 관할구역인 회부의 관건병, 단련병과 개인 사병인 아병의 지휘권만을 남겨 주었다. 이를 통해 절도사들은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그리고, 절도사들이 관할하는 병력이 감소하면서 회부에서 거두는 세금만으로도 흑자가 나자 그 흑자 부분을 조정에 상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했다. 이는 지군이 군대를 직접 유지하게 되면서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상공의 액수가 감소한 분량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당은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상공의 액수를 줄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 조정은 818년 절도사가 탁지영전사를 겸임하여 둔전 수입을 전용하거나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거기서 거둔 수입으로 번진을 운영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게 하였다. 이러한 번진 개혁을 통해 강력한 중앙정부가 각각의 번진을 순지화시키고 국력을 상당히 회복했다. 번진의 절도사 대부분은 중앙에서 내려보낸 문관들과 금군 출신의 무관들로 채워졌으며, 이들은 절수직을 천보 이전처럼 일종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한 관직 코스'로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중흥]]' 은 대략 40여 년간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