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왕조 (문단 편집) ===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 === || 왕명 || 인물 || 임명시기 || 비고 || || 서하태수(西河太守) || [[풍야부]] || 450년 || || || 우현왕(右賢王) || [[부여기]] || 457년 || 백제 왕족. || || 좌현왕(左賢王) || [[부여곤지]] || 457년 || 개로왕의 동생. 동성왕의 아버지. || || 불사후(弗斯侯) || [[부여례]] || 미상[* 부여고가 490년 불사후가 된 점을 보면 490년에 후작에서 밀려났거나 사망한 것으로 보여진다.] || 개로왕의 사위. || || 대방태수(帶方太守) || 장무(張茂) || 미상 || || || 면중왕(面中王) > 도한왕(都漢王) || [[저근]] || 미상[br]490년 || [[대성팔족]] 진씨(眞氏)로 추정됨. 항목 참조. || || 팔중후(八中侯) > 아착왕(阿錯王) || 부여고(扶餘古) || 미상[br]490년 || 백제 왕족. || || 매로왕(邁盧王) || 부여력(扶餘歷) || 490년 || 백제 왕족. || || 불사후(弗斯侯) || 부여고(扶餘固) || 490년 || 백제 왕족. || || 광양태수(廣陽太守) > 대방태수(帶方太守) || 고달(高達) || 490년 || || || 조선태수(朝鮮太守) > 광릉태수(廣陵太守) || 양무(楊茂) || 490년 || || || 청하태수(清河太守) || 회매(會邁) || 490년 || || || 매라왕(邁羅王) || [[사법명]] || 490년 || 대성팔족 사씨. || || 벽중왕(辟中王) || [[찬수류]] || 490년 || 대성팔족 진씨로 추정. 그러나 표기가 정립된 백제 후기에도 진씨와 따로 찬씨가 등장하기에 확실하진 않다. || || 불중후(弗中侯) || [[해예곤]] || 490년 || 대성팔족 해씨. || || 면중후(面中侯) || [[목간나]] || 490년 || 대성팔족 목씨. || || 낙랑태수(樂浪太守) || 모견(慕遺) || 490년 || || || 성양태수(城陽太守) || 왕무(王茂) || 490년 || || || 조선태수(朝鮮太守) || 장새(張塞) || 490년 || || 백제의 제후왕은 5세기 중반 ~ 후반인 [[개로왕]], [[동성왕]] 시기에 책봉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왕족 부여씨이다. 다만 5세기 후반 동성왕의 제후왕 책봉을 끝으로 백제의 제후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제후왕 제도가 폐기된 것인지, 기록이 소실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제후왕의 아들이 백제 군주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령왕]][* 다만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개로왕이란 설도 존재한다. 항목 참조.]은 각각 [[삼근왕]]과 동성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계와 문주왕계가 각각 한성 함락, 삼근왕의 요절로 단절되면서 당시 살아있었던 곤지왕의 아들들(동성왕, 무령왕)이 왕위에 옹립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