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왕조 (문단 편집) === 웅진도독 대방군왕 === || 대수 || 명칭 || 휘 || 재위기간 || 비고 || || 1대 ||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융]] || 융(隆) || 677년 ~ 682년 || 숭(崇)[* 《당회요》 〈백제전〉에서 부여숭으로 등장. 이는 당 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겹쳐서 [[피휘]]되었기 때문이다.]/[br]광록대부태상원외경(光祿大夫太常員外卿)에 임명됨. 사후 당나라 장안에 묻힘. || || 2대 ||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경]] || 경(敬)|| 690년 ~ ? || 부여융의 손자. [[측천무후]]에 의해 임명됨. || || ?대 || [[백제대방왕]](百濟 帶方王) || 불명 || 미상 || 724년 12월 당나라의 내신(內臣)으로 봉선제 참여.[br]부여경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음. || [[나당전쟁]]에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에게 축출당해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677년 [[당나라]]는 건안성으로 백제 유민들을 모으는 한편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하고 백제로 다시 보내려했으나, 부여융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682년에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이 사망한 뒤 [[측천무후]]는 그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했지만 이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724년 12월, 봉선제를 지낸 기록에 참여한 인물 중 '백제 대방왕(百濟 帶方王)'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적어도 8세기 초반까지는 대방군왕 직위를 가진 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인명이 적혀 있지 않아서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여경이 장수해서 725년 무렵까지 살아있었거나, 부여경 이후에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인물이 있었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