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 (문단 편집) === 사회와 계급 ===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은 [[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 혹은 평생 벼슬길을 막아버렸다고도 한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 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의 최고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7개 왕비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팔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왕비족이었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했으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되었다. 왕비를 배출하게 되면 해당 씨족이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능가하는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왕비족인 대성팔족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왕들을 시해했고 실제로 백제 왕의 대다수가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원래 위례성 시절에는 해씨, 진씨 2개 외척 세력이 있었으나 웅진으로 급히 피신하여 해당 충청도 토착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왕비족이 7개로 대거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성팔족]]에 의한 지배체제가 공고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귀족들은 고구려나 신라에도 있었던 것으로 애초에 대성팔족 자체에 사비, 웅진 토착 호족들일 개연성이 높은 성씨들이 있었는데, 이걸 갖고 신흥세력이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백제는 지역별 토착세력 같은 경우 신라보다 오히려 꽤 우대하는 편이었다. 대성팔족 중 상당수는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었으며 4~5세기 무렵부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남래(南來) 귀족 세력인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또한 대성팔족으로, 이들은 시조 온조왕의 십제 시절부터 온조와 동행한 세력으로 추정되며 한강 일대의 경제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파악된다. 반면에 신라는 토착 호족들이 촌주급까지만 할 수 있었으나 백제는 현령 같은 경우, 상당 부분 호족들에게 겸임시켜주는 편이었다.[* 전남 동부 일대는 그 일대 호족들이 [[대가야]]를 선택해서 백제에게 비협조적이었고, 경남 서부 일대는 백제가 옛 가야 소국 지배층이었던 호족들 자체를 믿을 수 없어,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대는 현령까지 전부 백제 중앙에서 파견했고, 군정 지배 형태를 관철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신분제는 관등,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관직, 복색,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 신분층 가운데 '''좌평''' 계열과 '''솔''' 계열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덕''' 계열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무명''' 계열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를 보건대 백제도 기록 부재일뿐 신라와 거의 동일한 골품제급 신분제도를 유지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강하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투호]]와 [[바둑]], [[장기(보드 게임)|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