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 (문단 편집) == 멸망 이후의 백제인들 == [[나당연합군]]의 [[백제멸망전|백제 정벌]] 및 [[백제부흥운동|부흥운동]] 진압, 그리고 신라의 승전으로 결판난 [[나당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당나라|당]]이나 [[야마토|왜국]]으로 끌려가거나 망명한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절대 다수의 백제인들은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최종적으로 오늘날 [[한국인|현대 한국인]], 더 나아가 [[한민족]]의 원류(原類)가 되었다'''. 다만 통일신라 내에서도 백제인들은 서로 거취를 달리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상당수가 신라의 내지(內地)로 사민되었지만 다수가 고토(古土)에 잔류해 훗날 [[후백제]]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 '''{{{+5 {{{#89236A 통일신라}}} ➪}}} {{{+4 {{{#6AB048 후백제}}}}}}''' [[나당전쟁]]을 끝으로 [[통일신라]]에 완전히 복속된 고국처럼, 백제인들의 절대 다수 또한 마찬가지로 신라에 편입되었다. 우선 백제 멸망과 나당전쟁을 전후로 하여 신라에 협조적이던 왕족과 귀족들은 신라의 [[문무왕]]과 [[신문왕]]이 하사하는 관등과 관직을 겸하게 되었지만[* [[좌평]] [[충상|충상(忠常)]]과 [[상영|상영(常永)]], 달솔 [[자간#s-5|자간(自簡)]]과 조복(助服), 은솔 무수(武守), 인수(仁守), 그리고 파가(波伽) 등. 이들은 [[백제멸망전|신라의 백제 정벌]]과 [[백제부흥운동]] 당시 투항한 뒤 신라군으로 종군한 백제 출신의 장수들로, [[고구려-당 전쟁|고구려 정벌]]과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참여하였다. 달솔(達率) 조복(助服)의 경우 전후 고타야군(古陁耶郡), 즉 오늘날 [[안동시]]에 해당되는 신라 내지(內地)쪽 지역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신라 내지(內地)로 반강제로 사민당하거나[* 일례로 [[나당전쟁]]의 개전과 함께 [[김품일]], [[김문영]], [[김천존]], [[죽지|김죽지]] 등을 필두로 한 신라군의 [[웅진도독부]] 정벌 당시 옛 [[백제]] 수도권이자 핵심지역의 82성(城)이 신라에 의해 순식간에 함락당하면서 성읍의 유력 민호와 하호(下戶)들이 모두 신라 내지(內地)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백제부흥운동]] 당시 미처 [[야마토|왜국]]으로 피난하지 못한 [[부여충지]], [[부여충승]] 등 임시수도 [[주류성]]의 백제부흥군 수뇌부 일동과 나머지 잔당들도 신라의 포로가 되면서 [[반파국|대가야인]]들처럼 신라 전역 곳곳에 뿔뿔히 사민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특기할만 건, [[문무왕]]이 백제인들은 포로로 붙잡아두면서도 [[일본인|왜인]]들은 그대로 풀어줬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신라가 후방인 왜국과의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훗날 있을 나당전쟁에 전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낮은 한직에 머물게 되면서 겉돌기도 하였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등.][* 백제 왕실인 [[부여씨]]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천 서씨]]도 시조인 서신일이 아찬(阿贊) 관등을 가졌음에도 [[서라벌]]과는 거리가 먼 [[이천시|남천주(南川州)]]의 일대 호족에 불과하였다.] 그래도 신라 측에서는 이들을 안무(安撫)할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내치진 않았다. [[나당전쟁]] 당시 신라는 당대 최강의 군대였던 전성기 시절의 당나라 군대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힘을 빌렸으며, 삼국통일 직후에는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白襟誓幢)과 청금서당(靑襟誓幢)을 활용한 구서당(九誓幢)의 중앙군 체제를 완성시켰다. 다만 신라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경우 현지에 동화되면서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토(古土)에 잔류한 백제인들도 똑같이 신라의 통치에 순응하면서 살았는데, 지배층 가운데 신라로 끌려가지 않은 부류의 경우 신라에서 지정한 오소경(五小京)[* [[청주시|서원경(西原京)]], [[충주시|국원경(國原京)]] 등.]에 정착하거나 일대의 호족(豪族)[* [[전주 류씨]] 등.]이나 호장(戶長)[* [[신평 이씨]] 등.]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신라 내지, [[당나라]], [[야마토|왜국]]으로 거처가 바뀌지 않고 옛 백제 영토에 잔류한 '''[[대성팔족]]'''[* 상당수가 신라의 탄압을 피해 획을 달리하는 개성(改性)을 통해서 기존의 성씨와 생김새가 유사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있다. [[왕씨 몰살]] 당시 왕위에 가까운 왕씨들이 탄압을 피해 성씨를 옥(玉) 등으로 바꾼 것과 같은 맥락이다.]의 후손으로 유력시되고 있는 [[백(성씨)|백씨(苩氏)]][* 여담으로 백씨(白氏)는 [[틀:선원선계|선원선계]]의 고증을 통해서 '''[[태조(조선)|이성계]]와 [[전주 이씨]]의 모계 조상'''으로 자주 확인되고 있는 성씨이기도 하다.], [[임(성씨)|목씨(木氏)]], [[구(성씨)|진씨(眞氏)]] 외에도 백제의 귀족 계통 성씨인 [[마(성씨)|마씨(馬氏)]], [[전(성씨)|전씨(全氏)]], [[여양 진씨|진씨(陳氏)]], [[진주 하씨|하씨(河氏)]][* 이외에도 백제계 귀족 성씨로 추정되는 성씨로는 [[길(성씨)|길씨(吉氏)]]가 있다.] 등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 고토에 남은 백제 유민들은 [[골품제]]의 특성상 경직된 신분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에 따라 [[흥덕왕|신라 조정]]이 정하는 규약에 따라 생활에 제약이 걸리기도 했으며, 때문에 [[삼한일통]]의 표식어에도 불구하고 신라인과 백제인의 구분을 확실히하는 신라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 백제인들로 하여금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당 부분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덕왕]] 때가지만 해도 무열왕계를 필두로 한 신라 왕실 차원에서 백제 유민과 백제의 옛 불교 문화를 존중하는 기조가 있었지만[* 미륵 신앙의 거물이자 시조로 평가받는 [[대성팔족]] 출신의 백제계 고승인 [[진표(신라)|진표]]를 회유하고 백제의 고사(古寺)인 [[금산사]]를 확장했으며 [[미륵사]] 또한 후원하였다.], 이도 [[경덕왕]] 사후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신라가 쇠퇴일로에 빠지게 되면서 나라가 삼등분 되었을 때 백제 영토에 잔류한 백제 유민들 다수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합류'''하게 되었다. 다만 [[침미다례]]로부터 이어지는 세력은 오래 전부터 경쟁하던 광주 세력과의 악감정 탓에 광주 세력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견훤에겐 도저히 합류할 수가 없었고, 때문에 [[왕건]]의 [[고려]]에 협조하였다. 최종적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면서 후백제의 백제인들도 고구려계, 신라계와 더불어 [[한민족]]의 원류(原類) 집단이 되는 데 일조하게 되지만, 적어도 일부는 [[여몽전쟁]] 시기까지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연년 형제의 난]] 문서로.] * '''{{{+3 {{{#E0709B 왜국}}}}}}''' 세간의 인식[* 대량의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국의 근본이 되었다는 대중적인 인식을 말한다. 김용운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같은 책들이 이런 인식을 부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어마저도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목간을 전후로 하여 신라어가 아닌 백제어의 수사가 현대 한국어와 판박이 수준으로 일치함이 알려지게 되면서 김용운의 주장도 자연스럽게 반박되었다.]과는 달리, 멸망을 전후로 [[야마토|왜국]]으로 도피한 백제인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사료상[* [[삼국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을 기준으로 백제 멸망 이후 왜국에서 이름을 전하는 백제인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면서 귀향하는 왜군을 따라 운좋게 도왜(道倭)한 부류[* [[좌평]] [[부여자신]](扶餘自信)과 [[귀실집사]](鬼室集斯),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水), [[억례복류]](憶禮福留) 등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사택소명(沙宅昭明)이라는 인물도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멸망 이전부터 백제가 아닌 왜국에 잔류하고 있었던 부류들[* 대표적으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 [[부여충승]], [[부여충지]] 등이 있었다. 다만 [[부여충승]]과 [[부여충지]]는 [[주류성]]의 함락과 함께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멸망 이전부터 [[가야]]와 [[백제]]는 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래인들이 왜국으로 이주한 바 있다.]이었다. 기본적으로 백제의 땅과 바다를 틀어쥐고 있었던 [[나당연합군]]을 피해 당시 바다 건너의 왜국으로 망명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는데, 그나마 백제인들의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왜군의 대선단이 [[백강 전투]] 때 궤멸당하면서 백제를 벗어나 왜국으로 갈 수 있었던 자는 필연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백제부흥군의 수뇌부는 대부분 [[나당연합군]]에 투항한 상황이었다. [[지수신]]이 여전히 지키고 있었던 임존성의 [[흑치상지]]나 [[사타상여]]는 [[당나라]]에 귀순했고, [[주류성]]의 백제부흥군은 신라군의 포로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신라]]는 백제 영토뿐만 아니라 백제의 인구를 흡수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는 상황 속에서 백제인들에게 쉽사리 퇴로를 열어주는 일이 없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백제부흥군 수뇌부는 임시수도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잠시 천도하는데, 신라군의 진격으로 피성이 위태로워지면서 2달만에 다시금 [[주류성]]으로 환도한 바 있었다.]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의 경우에는 [[야마토]] 조정에서 하사하는 관등을 받고, 각자 지정된 장소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일례로 [[부여자신]](扶餘自信)은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백제인 남녀 700인과 함께 [[칸자키군(효고)|칸자키군]](神崎郡) 인근 아후미노쿠니(近江國)로 옮겨졌다.] 당시 야마토 조정의 관위를 신라의 것과 비교했을 때 결코 높은 관등을 수여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왜국으로 도피한 백제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관등을 하사받은 [[부여자신]](扶餘自信)은 왜국의 26관위 중 9위인 대금하(大錦下)의 관위를 하사받았다.] 망명한 백제인들이 그럼에도 일본에 상당한 정치문화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점이다. 왜국에서 법관대보(法官大輔)를 지낸 사택소명(沙宅昭明)이나 학직두(學職頭)를 역임한 [[귀실집사|귀실집사(鬼室集斯)]] 같은 백제인들은 일본의 [[다이호 율령|율령 반포]]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에 정착한 백제의 고위 왕족과 귀족들은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씨성(氏性)을 하사받았는데, [[부여선광]]의 경우, 성씨와 함께 '건길지(王)'라는 카바네(姓)까지 하사받기도 하였다. 한편, 일각에서는 왜국으로 도피한 백제인들이 왜국 여론에 영향을 끼쳐 반(反)신라 감정을 부추겼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는 정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라의 [[문무왕]]은 스물여덟 명의 장수들을 직접 거느리고서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주류성]]을 몸소 함락시킬 때 붙잡은 왜군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절단을 보내 친선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왜국은 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전개였다.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당나라와의 전면전]]을 눈앞에 두고 [[야마토|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왜국은 [[신라|방패막이]]가 없어질 시 [[당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덕왕]]이 대당(對唐) 외교를 정상화시킬 때까지 신라와 왜국은 나름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 '''{{{+1 {{{#BDB76B 당나라}}}}}}''' {{{+1 ➪}}} '''{{{+1 {{{#959EA2 발해}}}}}}''' [[백제멸망전|백제 멸망]]을 전후로 [[당나라]]의 장수인 [[소정방]]은 [[의자왕]]을 포함한 백제 왕실,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인, 그리고 백성 12,807명을 취한 뒤 당나라로 압송시켰다. 당나라에 압송된 [[고구려]] 유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당나라의 백제인들도 마찬가지로 당나라 황실과 조정에 의해 신분이 귀속되면서 이민족으로서의 삶을 구가하다가 현지에 동화되었다. 백제인 가운데 당나라 조정에 이름을 알려 입신양명한 이들로는 대표적으로 [[웅진도독부]]의 도독을 지낸 태자 [[부여융]][* 태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의 딸인 [[부여태비]]의 묘도 전해지고 있다.], 장수 [[흑치상지]], [[부여준]], [[사타충의]] 등이 전해진다. 간혹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들 가운데 [[사택손등]]처럼 귀국해 [[웅진도독부]]의 관료 신분으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례는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의 하남(河南) 일대로 끌려가다가 웅진도독부의 처소가 [[고구려]]의 영토였던 [[건안성]]으로 옮겨질 때 같이 옮겨진 나머지 10,000여명의 유민들은 건안성에서 어떤 식으로든 존속하다가 훗날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에 의해 흡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유민들의 수가 기본적으로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이들의 인지도는 오히려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면서 활약상을 선보였던 백제인들에 비해서 떨어지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