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한국의 군사조직)] 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제도의 형태의 군사 행정 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 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 → 달솔 → 방령 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백제에 [[싸울아비]] - 무절이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싸울아비]]'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튀어나온 용어이며 '무절'이라는 용어도 위서(僞書)의 용어이기에 백제에 고구려와 같은 경당(扃堂) 체제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백제도 고대 국가들처럼 [[기병]] - [[보병]] - [[궁수]]의 병과 체제가 있었고, 주력이자 정예병은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나 상대적으로 영토가 목축 지대가 아닌 지역인 경기 - 충청 - 전라도에 분포해 있었기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이는 훗날 [[후백제]]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백제도 북방에서 내려와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찰갑]]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였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보편화된 갑옷이었던 [[판갑]]도 나오며, [[고구려]]와 다르게 혼용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아래 길이가 크게 비대칭인 일본활(유미)과 비슷한 형태의 목궁이 출토되었으며 북방계 민족들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도 목궁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제의 활 형태가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 활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는 주장도 있지만,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제군의 총 병력은 확인되기 어려우나 최대 30,000명 규모까지 원정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과 중흥을 이끈 백제 [[성왕(백제)|성왕]] 시절의 동원 능력을 보면 30,000명 규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이 이끌던 병력은 총 30,000명에 좌평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좌평 4명이서 30,000명이니 30,000 / 4 = 7,500명이므로, 6좌평이 거느린 총 병력은 45,000명이 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며, 좌평들이 모두 동일한 병력을 거느렸을 리도 없고, 예비대도 존재했을 것이므로 백제군의 총 병력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대중들에게는 백제가 "해상 왕국"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환황해권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만큼 해상 활동 기반이 잘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여러 왕조와 교역도 활발했으며, 후기 신라와 당이 가까웠던 것 이상으로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과 무척 밀접했고, 심지어 성왕 대의 승려인 [[겸익]]은 중국 내륙를 통하지 않고 해로를 통해서만 중인도로 건너가 인도 불승 배달다삼장과 함께 불경을 싣고 오기도 했다. 백제선은 외국에도 알려져, 일본에서도 야마토노아야노아타히아가타(倭漢直縣) 등을 파견해 백제선을 만들게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수군 또한 융성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제의 수군 역시 그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며, 백제가 강력한 해상 통제력을 발휘했다고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백제의 수군과 관련된 기록은 [[아신왕]]이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다[* 관미성 탈환 시도 때 수군을 동원했다고 보는 이유는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였다(四面峭絶 海水環繞)'는 관미성의 지형 때문.]는 기록과 [[동성왕]] 시기 북위와의 전투[* 뜬금없이 북위와 싸운 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요서경략설]] 문서로.], 탐라 정벌계획[* 수군이 없으면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등등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이는 백제에 수군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될 뿐 수군이 강력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남은 백제의 전투 기록을 봐도 수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수준이며, 대부분이 육전에 대한 기록이라, 백제군의 주력은 육군이며 수군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해의 해상 통제권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백제멸망전|백제 멸망]]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북송]]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방대한 백과사전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책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금칠이란 정말로 갑옷에 황금을 칠하거나 도금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황금색 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 백제에서는 황칠(黃漆)나무에서 흘러나오는 황금색을 띈 수액을 갑옷에 발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422|#]]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2&cid=49615&categoryId=49800|#]]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의장기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