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인엽 (문단 편집) ==== 살인 장군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문단, 토론주소1=NoxiousRoomySynonymousLadybug, 합의사항1=문단 내용을 복원 및 존치)] || 아래 내용의 출처는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권-제2부-제2소위원회 사건(3)-1[[http://www.jinsil.go.kr/fnt/nac/selectNoticeList.do?bbsId=BBSMSTR_000000000715|링크]] 이다.|| * p.507, 여수지역 [[여순사건]] 中 >12연대 하사관교육대 선임하사였던 성찬호는 “백인엽은 (…) 전쟁통이니까 강력히 부하를 통솔하는 것은 좋지만, 부하이건 시민이건 빨치산이 되었건 구분 없이 죽인다 이겁니다. 너 빨치산 갖다 주었지, 이러면서, 너 밥 갖다 주었지? 밥 갖다가 주었습니다. 그러면 빵! 쏘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314)성찬호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엽은 담력 훈련을 위한 총검술 시범 대상으로 민간인을 이용하기도 했고, 시체를 전시하여 ‘주민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성찬호 증언록 ,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소장 >또한 당시 제12연대 2대대 5중대장이었던 임○○은 당시 백인엽이 즉결처분권을 부하장교들에게 위임하였고, 일부 장교들이 ‘즉결처분’을 남발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임○○은 휘하 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위임한’ 백인엽을 찾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315)참고인 임○○에 따르면, 같은 중대에 황해도 출신으로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정○○ 소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여 자신과 갈등을 빚었다고 말했다. 참고인 임○○, 진술조서(2008. 4. 24.) >본 사건 당시 12연대의 지휘관은 연대장 백인기․부연대장 백인엽이었으며, 이들은 직접 여수에서 주둔하면서 민간인 사살을 지휘․명령하였다. 백인엽은 백인기 연대장 사망 이후 연대를 지휘했으며, 백인엽이 제17연대장으로 전출된 이후 송석하가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송석하 연대장은 12연대 잔류 병력을 지휘하며 1949년 1월까지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316)참고인 오봉규, 진술녹취록(2008. 1. 25) * p.592, 여수지역 [[여순사건]] 中 >백인엽에게 즉결처분 남용을 중지해 달라 말해서 그 이후로 즉결처분이 줄어들었음. 물론 완벽하게 없어진 것은 아니었음. 우리 중대에 정소위가 있었음. 정소위가 즉결처분 명령에 불복한 병사를 쏴 죽였음. 그래서 권총을 꺼내서 “너 같은 놈은 살인마다. 이북에서 내려왔다고 사람을 죽여도 되느냐”고 막머라고 그랬음. 정소위가 쏴 봐 쏴 봐 그랬음. 그래서 내가 너 같은 놈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른다며 겁을 줬음. 그런 놈은 군을 먹칠하는 놈이야.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즉결처분을 지시한 백인엽에게 담판을 지러 갔음. 즉결처분하는 걸 3번이나 보고서 못 참고 백인엽에게 따진 것임. 그러니까 알았다고 시정하겠다고 했음 - 임○○(22세), 12연대 2대대 6중대, 2008. 4. 24. 인천 서구 석남동 자택, 진술조서 || 아래 내용의 출처는 이무호,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 지식산업사, 2009(초판 2쇄) 이다.|| * p.238 >'''무분별한 부하 즉결 처분''' >한국 전쟁 초기에 '''17연대 연대장 P 대령'''은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잘 내리기로 소문난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예하 부대의 전투력 향상에는 남달리 공이 많은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제대 뒤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17연대 출신 한 퇴역 장교의 증언을 소개한다. > >1950년 겨울, 17연대가 광나루 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는 가운데 휘하 모 중대장의 운전병이 추운 날씨에 지프의 발동을 꺼뜨렸다고 해서, 그 중대장에게 운전병을 총살하라고 명했다. 중대장이 주저하자 자기 손으로 그 운전병을 총살했다. >한번은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등에 짊어지고 행군 중인 통신중대의 후미를 허둥지둥 따라가던 한 통신병이 자기(연대장)가 탄 지프의 진로를 방해한다고 해서 통신 중대장 김○○ 대위를 불러서 그 통신병을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김 대위는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 통신병에게 총을 한 방만 쏘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버렸다. 연대장은 한 손에 총을 맞고 신음하는 그 통신병을 자기 손으로 사살하고 나서, 수행하던 헌병 중대장 박○○대위에게 확인 사살을 명령했다. 박 대위는 명령대로 확인 사살을 했다. 박대위는 '5·16'이 있고 난 뒤에 퇴역해서 중앙청 요직에 있다가 자살했다고 들었다. > >또 한번은 한 신임 육군 소위가 호 안에서 근무하다가 불시에 나타난 연대장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껌을 씹으면서 경례를 했다고 해서, 그 소위가 소속된 대대장 노○○ 대위를 불러서 그를 즉석에서 총살케 했다. 노 대위는 그 뒤 복부에 총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군인으로서 백인엽은 인터넷에서 부하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과 처형 등으로 매우 유명하다.[* 구글에 '[[https://www.google.com/search?q=%EB%B0%B1%EC%9D%B8%EC%97%BD+%EC%A6%89%EA%B2%B0%EC%B2%98%EB%B6%84&newwindow=1&sxsrf=APq-WBuTu3Oh8c_39lo9tA17qouETFjT4g%3A1646406398633&ei=_ioiYp-iJqzh2roPovGWoA4&ved=0ahUKEwifma_k3az2AhWssFYBHaK4BeQQ4dUDCA4&uact=5&oq=%EB%B0%B1%EC%9D%B8%EC%97%BD+%EC%A6%89%EA%B2%B0%EC%B2%98%EB%B6%84&gs_lcp=Cgdnd3Mtd2l6EAMyBAgjECc6CwgAEIAEELEDEIMBOgUIABCABDoICAAQgAQQsQM6DgguEIAEELEDEIMBENQCOgsILhCABBCxAxCDAToFCC4QgAQ6CAguEIAEENQCOgQIABBDOgQIABAeSgQIQRgASgQIRhgAUABYxA9giRBoAXAAeAGAAYMBiAHaEpIBBDAuMjCYAQCgAQHAAQE&sclient=gws-wiz|백인엽 즉결처분]]'이나 '[[https://www.google.com/search?q=%EB%B0%B1%EC%9D%B8%EC%97%BD+%EB%B6%80%ED%95%98%EC%82%B4%EC%9D%B8&newwindow=1&sxsrf=APq-WBuAJrPdFvxDea1jIDbFxUrYjVr6EA%3A1646406391136&ei=9yoiYuP7B_Dm2roPz9GTkA4&ved=0ahUKEwij0-Xg3az2AhVws1YBHc_oBOIQ4dUDCA4&uact=5&oq=%EB%B0%B1%EC%9D%B8%EC%97%BD+%EB%B6%80%ED%95%98%EC%82%B4%EC%9D%B8&gs_lcp=Cgdnd3Mtd2l6EAMyBAgjECdKBAhBGAFKBAhGGABQ7wRYpgdghQloAnAAeAGAAXmIAcoDkgEDMC40mAEAoAEBwAEB&sclient=gws-wiz|백인엽 부하살인]]'등으로 검색하면 여러 결과가 나온다.] [[진실화해위원회]]의 1기 활동(2005-2010)기에 [[여순사건]]에 대한 조사를 행하면서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었던 백인엽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즉결처분과 학살행위에 대한 진술과 진상조사 내용을 발표한 적이 있다. 주로 피해자들은 민간인들이었고, 병사들의 경우 백인엽이 휘하 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 및 위임하여 장교들이 남발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인엽이 직접 진행하거나, 명령한 부하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과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2003년에 참전용사인 이무호[* 1930년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태생으로 한국전쟁 며칠전에 월남하여 피난하던 중 자원입대하여 대한민국군으로 참전한 뒤 1979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가 한국전쟁 회고록인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을 내면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무호는 책에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당사자를 한국전쟁 초기 17연대 P 대령이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한국전쟁 초기 17연대장이고, 계급이 대령이면서 성의 이니셜이 P인 자는 백인엽 밖에 없다. 위에서 인용되듯이, 시동을 꺼드렸다던가, 행군중인 통신병이 자기 눈에 거슬린다던가, 경례중에 껌을 씹는다던가의 이유로 즉결처분으로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소개 하였다. 이 책에서 이무호는 스스로 당시 2사단장이던 함○○ 준장에게 즉결처분을 명령받아[* 이무호는 부대 재편성 대기 중 대대장 직할 연락병으로서 부상당한 대대장의 신변확보를 구실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헌병과 사단장에게 붙들렸고, 이유를 묻는 사단장에게 자초지종을 대답하였으나, 사단장에게 '각하'란 존칭을 쓰지 않고 '장교님'이라 썼다는 이유로 즉결처분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헌병대에게 총살당할 위기에서 겨우 모면하여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백인엽의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일단, 책의 내용에 의하면 이무호는 백인엽의 즉결처분을 목격한 적은 없고, 17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들었던 소문과 증언만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무호는 책에서 1950년 12월에 맞이한 신임 대대장이 17연대에서 전속해왔던 최동훈 소령이었으며[* p.168, "며칠 뒤 우리 대대에 신임 대대장이 부임해 왔다. 그는 제17연대에서 전속해 온 최동훈(崔東訓) 소령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1951년 1월 중공군의 38선 이남 공세로부터 최소령과 함께 퇴각하던 중에 17연대 병사들과 만나 합류하게 된 점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책 pp.235-237] 위의 인용문 역시 17연대 장병들과 합류를 언급한 바로 뒷장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나무위키 본문서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책임자가 17연대장인 백인엽으로 서술되어있던 것이 인터넷으로 와전된 상황인데([[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oriental_medicine&no=266162|링크1]], [[https://mobile.twitter.com/fgold5702/status/1283723826870620162?lang=bn|링크2]]),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행한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제2부[[https://www.jinsil.go.kr/fnt/nac/selectNoticeList.do?bbsId=BBSMSTR_000000000715|링크]]에 의하면, 학살에 관여한 병력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등이고, 17연대는 대전형무소의 외곽경비업무만 보았다고 조사되었다.[* 동 보고서 각주 46 : 6ㆍ25전쟁사 등 공간사에는 17연대가 재소자들의 탈옥기도를 막았다고 나와 있으나 당시 형무관들은 17연대는 외곽경비만 섰고, 미결수들의 소동은 대전형무소의 특별경비대가 저지하였고, 17연대는 외곽에서 형무소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출근하기 위해 온 형무관을 총격을 가해 형무관 김○○이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특별경비대 분대장 이○○은 연와공장에 수용된 이들이 일반 미결수라고만 진술하였으나, 특별경비대 대원 김○○은 이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해 이들은 보도연맹원으로 판단된다.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2009.1.30);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중앙일보사, 앞의 책 제1권, 1983. 283~284쪽;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ㆍ25전쟁사 제3권, 2006. 22쪽][* 동 보고서 각주 47 :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1950.6.27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에게 ‘제17연대는 대전에 피난중인 정부 경호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제17연대는 1950.6.27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 집결하여 정부경호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950.7.1 국방부 정훈국장 이○○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과 경찰의 보고를 받고, 제17연대 병력을 형무소 경비로 보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개정판), 1977, 484쪽; 중앙일보사, 앞의 책, 제1권, 1983. 283~284쪽;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2009.1.30),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2009.2.11), 참고인 정○○ 진술녹취록(2009.2.11), 참고인 김○○ 진술] 게다가 17연대가 2사단에 예속되는 것은 1950년 11월이고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은 1950년 7월에 일어났으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백인엽과 17연대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과 무관한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