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범일지 (문단 편집) == 보물 제1245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12450000,1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白凡逸志一九二九年(上卷)一九四三年(下卷))]] >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명성황후|국모]]의 [[을미사변|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시|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충칭|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광복|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 >이『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