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동수 (문단 편집) == 일대기 == 1743년([[영조]] 19)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백사굉(白師宏)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재하(申載夏)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장수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경종(조선)|경종]] 때 무관을 지낸 충장공 백시구의 후손이다. [[서얼]] 출신의 무인인 데다가 말년엔 [[정조(조선)|정조]]의 승하 이후 [[노론]]으로부터 벼슬에서 축출되어 유배당함으로써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다. 1771년(영조 47)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관으로 식년시 무과에 병과 1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c_1771_006595|급제]]하였으나, 인원 초과로 인해 벼슬을 얻지 못하고 1773년 강원도 인제 기린협(지금의 기린면)으로 들어가 혼자 무술을 연마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1776년(정조 원년) 정9품 부사용(副司勇)에 제수되었고, 1782년 친위 군영인 [[장용영]]이 조직되면서 1788년 45세의[* 요즘의 환갑과 비슷하게 대우받는 연령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엘리트 집단인 장용영 무사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신체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늦은 나이에 장용영의 종9품 초관(哨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집춘영(集春營) 및 [[어영청]]의 초관, 분 수문장(分守門將) 등을 두루 지내고 1790년 무예24기를 정리한 군사 훈련 교재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며 무인으로서의 명성을 떨쳤으며, 그 해 종6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791년에는 종5품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제수되었고 1792년에는 종6품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냈다. 1795년 종4품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1796년 종6품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등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지속했다. 1800년 6월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한 뒤에도 아들 순조에 의해 중용되어 1802년 종4품 [[박천군]]수(博川郡守) 겸 파총(兼把摠)를 역임했으나, 박천군수 재직 시절 '불왕법장(不枉法贓)', 즉 국법을 어기지는 않았으나 뇌물을 받은 죄로 1806년 [[경상도]] [[산청군|단성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07년 장남 백심진(白心鎭)의 상소로 석방되었으며, 1810년(순조 10) 종3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1816년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