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영향 == [[서유럽]] 최초의 국제전이자 [[중세|중세 전성기]]와 [[근세|근대 초기]] 사이의 [[과도기]]를 장식한 전쟁이다. ○ ''정치'' *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 시대에 확립되었거나 시험적으로 시행되었던 근대적 행정 제도들이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더 크게 확장되고 통합되거나 정교해졌다. 잉글랜드 정부는 인구가 4배 정도 많은 유럽 최강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족한 전비를 쥐어짜내기 위해 지난 세기 동안 검증되었거나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탁상공론과 실제로 가능한 것을 어느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도 몇 번의 큰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 제도를 개혁했다. * 민족의식과 문학작품을 활용한 전쟁 [[프로파간다]] 전략이 장기적이고 일관되게 시행되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전쟁이다. 에드워드 1세는 13세기에 [[아서 왕 전설]]이 전 유럽에서 대유행하면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전설적 영웅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기함으로써 외교적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헨리 3세]]의 치세 말기에 완성된 잉글랜드 민족의식을 자극해서 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책을 펼쳤다. [[에드워드 3세]]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으며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정복을 위해 준비된 노르망디 함대를 전멸시키고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면서 한때 아서 왕의 후계자인 기사 왕이자 잉글랜드 국민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 그 결과 특히 잉글랜드는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https://youtu.be/Y_35HGThNyg?t=2625|'근대 국가']]에 가까운 모습을 전쟁 기간 동안 빠르게 갖추었다. 뒤이은 [[장미전쟁]]의 긴 혼란기와 [[튜더 왕조|튜더]] [[절대왕정]]의 묵직한 존재감에 밀려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에드워드 3세가 말년에 기력을 잃고 그가 죽은 뒤에는 10살짜리 손자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른 1370년대, 왕권이 가장 취약하고 전황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도 잉글랜드 의회는 프랑스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10년 사이 무려 100만 파운드의 전쟁세를 승인했다. 전쟁 초기 10년 동안 에드워드의 북부 프랑스 침공 작전에 대한 의회의 반응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1381년이 돼서야 국민들은 결국 인내심을 잃었고 [[인두세]] 부과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지만 반란군이 제기한 불만은 세금 자체가 아니라 그 많은 세금이 왕국의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어린 왕의 무능하고 부패한 섭정단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헛되이 쓰였다는 것이었다. 이들 반란군은 단순히 굶주림에 미친 농노들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이기도 했다. 켄트 주의 자유민 소작농들도 자신들과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지역 출신의 농노 한 명이 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했으며 반란군은 런던으로 진군하는 중에도 해안 마을들에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450년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서퍽 공작을 습격해 살해한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은 (기소장에 적힌 공작의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작이 [[헨리 6세]]의 인장이 찍힌 안전통행증을 내밀었음에도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라고 답함으로써 이제 교육받지 않은 하층민들조차 왕국의 주권과 국왕의 인격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경제'' * 국경의 요새 주둔군 유지비나 대규모 캠페인에 투입되는 전비부터 소소하게는 포로의 몸값이나 보호비 지불 등 전쟁으로 막대한 자금이 융통되면서 저지대 도시들이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은행업 등 유럽의 금융업이 발달했다. ○ ''군사'' * 이전에도 유럽의 전쟁에서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이 전쟁은 용병들이 대활약을 한 전쟁이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실업자가 된 잉글랜드 직업군인들을 중심으로 뭉친 다국적 용병 집단 그랜드컴퍼니는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뒤 아비뇽을 포위해서 교황한테까지 보호비를 뜯어내고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져 거의 20년 가까이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샤를 5세]] 시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 제도가 시행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귀족 신분과 군인 직업을 구분하는 관념이 강화되었다. 국경의 요새 주둔군 사이의 전초전이 거의 백 년 동안 계속되면서 [[고인물]]화된 전문 직업군인들은 이제 몇 년에 한 번씩 왕명으로 군대에 소집되는 귀족 지주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맨앳암즈|중무장 전사]]는 여전히 전쟁의 주역이었고 명예로운 지위로 여겨졌으며 상당수는 귀족출신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신분과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예를들어 1393년 샤를 6세의 칙령은 "전쟁에 복무하며 귀족다운 삶(중무장 전사로서 참전하는 것)을 사는 귀족이 아닌,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 가계 출신의 귀족'은 조세에 관한 한 비귀족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세금을 면제받지 않는다"고 포고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덜 명예로운 방식이기는 하지만 귀족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족 신분과 군인 직업이 구분되는 추세는 적어도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넓게 보면 11세기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년전쟁이 없었더라도 기존의 역사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변화가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군대에 요구되는 규율이 엄격해졌다. 물론 전투에서 패배한 군대를 규율이 부족해서 졌다고 비난하며 규율을 강조하는 클리셰는 옛날부터 흔했고 이 때문에 근대 역사가들이 중세시대에는 규율이 개판인 군대밖에 없었다고 오해까지 할 정도였지만 백년전쟁 기간 동안 군대의 규율은 더 넓은 범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었으며 낭만적인 궁정문학에까지 침투했다. 13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궁정기사였던 조프루아 드 샤르니(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는 저서인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에서, '개인의 영광을 좇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군인이 계약상의 급료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를 '좋은 토론 주제'로 보았다. 그러나 1380년대 법학자 오노레 보네는 군인은 왕이나 왕이 임명한 지휘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1374년 샤를 5세가 제정한 군사법령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돼 있었다. ○ ''기타''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이 시기 [[동유럽]]에서도 급성장하던 [[오스만국]]이 [[발칸반도]]로 침입해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항하는 많은 전투들이 있었다. * [[동로마 제국]]의 [[갈리폴리]]. 대지진 이후,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1354): 첫 번째 침략. * [[아드리아노폴리스]] 점령(1365): [[오스만 베이국]]의 수도화 * 제1차 [[코소보 전투]](1389): 오스만 승 * [[니코폴리스 전투]](1396): 오스만 승 *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1431년은 [[블라드 가시공]]이 태어낸 해이다. * [[바르나 전투]](1444) 오스만 승 * [[알바니아]]에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40세)의 반란 시작(1444) * 제2차 [[코소보 전투]](1448): [[오스만 술탄국]] 승 *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 [[오스만 술탄국]] 승 *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손등을 앞으로 해서 V를 만드는 것이 매우 심한 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현대에 만들어지진 속설이다. 우선 장궁을 당길 때는 손가락 2개가 아닌 3개를 사용하고, 백년 전쟁 시기의 기록에는 손가락 세 개(두 개가 아닌)를 자르겠다고 위협한 사례가 단 한 번 등장하며 모욕하기 위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궁수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원래 가끔 있는 일이었다. 십자군시대 튀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도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다. * 이 전쟁과 비슷한 규모의 전쟁을 치른 두 국가가 동아시아에 있었다. 바로 [[북송|송나라]]와 [[금나라]]인데, 이 두 국가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전인 1126년부터 1234년까지 총 108년이라는 위엄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