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가스코뉴의 주권 (1259~1327) === [[파일:Gascony around 1300.png |width=520]] >이들의 크고도 좋은 사무실은 궁전 북벽에 특별한 출입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여기에서 처리되는 까다로운 업무들이 고도의 평온함과 완벽한 칩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등법원 판사들이라고 부르는 언제나 깨어있는 노련한 인사들이 그들의 법정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법과 관습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들로 노련하고도 관대하게 소송들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적 선고를 벼락같이 내리친다. 이 선고들은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배석자들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신과 법에 대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백한 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왕조|악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함에 비례하여 고난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 >---- >장 드 장덩 저, 홍용진 역, '파리 예찬', 1322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Kenneth Alan Fowler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윌리엄]]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직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봉건제]]'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작 중세인들은 '중세 봉건제'라는 개념을 알지도 못했고, 봉건제(feudalism)라는 용어는 1800년경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당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회현상은 전부 봉건제라고 불렀다. 당장 '봉건계약'의 종류가 위키백과 목록에 있는 것만 해도 수십 개는 되는 이유다. 따라서 '중세시대에는 봉건제 때문에 이러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있었다'는 식의 설명은 대개 선후관계가 뒤바뀐 설명이다.] 단순히 이전까지는 [[카페 왕조]]의 권위가 일드프랑스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나 [[리처드 1세]]에게 감히 신하로서 신서를 하거나 부조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00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신서를 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대가로 2만 마르크를 바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 뒤 [[존 왕]]이 대륙 영토를 한방에 다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헨리 3세]]는 1259년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의 영토를 보장받는 대신 신서를 다시 시작했고, 그렇게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 땅의 영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몰수당했지만 [[가스코뉴]]의 일부 영토와 함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었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북쪽의 푸아투에 비하면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지만 존 왕이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전부 잃은 뒤로 잉글랜드의 와인 수요를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다섯 개의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제하는 최요충지에 위치한 [[보르도]] 시는 바다를 통한 곡물 수입과 와인 수출에 의존하는 내륙 도시들의 목숨줄을 대놓고 쥐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들은 보르도 시민들의 충성심만 유지해도 지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면적은 100년 사이 3배까지 늘어났으며 가스코뉴에서 왕실이 얻은 수입은 1307년 17000파운드, 1324년 13000파운드로, 평시에 13000파운드 정도[* 전시에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서 최대 8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였던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과 비슷했다. 그러나 13세기와 14세기초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가스코뉴의 영지는 단지 평생에 한두 번 자존심을 굽히고 프랑스 왕에게 찾아가서 신서를 하는 것 이상의 가혹한 대가를 잉글랜드 왕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1270년대에 확립된 파리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가스코뉴인들은 프랑스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공작들[* 에드워드 1세는 전쟁을 제외하면 2년 머물렀고, 후대의 왕들은 백년전쟁에서 패배하고 가스코뉴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는 것도 아니라서 기회만 있으면 파리고등법원에 찔렀다. 프랑스에서 가장 공정한 판결을 한다는 당시 고등법원의 선전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서 1311년에는 작은 농촌 마을인 쿠슈의 주민들이 대귀족이자 왕의 측근인 부르고뉴 공작을 상대로 승소한 적도 있었다. 초기 파리고등법원은 귀족들의 법정과 경쟁 중이었는데, 다른 법정과 똑같다는 평판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대관들이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될 때마다 보르도에 있는 공작의 정부는 마비되었고 권위에 손상을 입었으며 재정적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293년 보르도와 바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고 프롱삭에서는 국왕의 세관원 4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에 대관들을 파견해서 폭동에 책임이 있는 도시 유력자들의 신병을 양도하라고 명령했고, [[에드워드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법정에 소환했다. 에드워드가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자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완벽하게 속은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당연히 에드워드가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가스코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반란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주둔군을 쫓아냈는데,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 없이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03년 5월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이 전쟁에서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소모한 전비는 총 40만 파운드로, 공작 정부의 10년치 수입을 훨씬 상회했다. 필리프는 비록 에드워드를 상대로는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과 파리고등법원 관료들의 선전과 달리 프랑스군은 무적이 아니며 동시다발적 전장에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후대의 왕들에게 불안 요소를 남겨두었다.[* 프랑스에 비해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어는 공격. 즉 끝없이 밀려오는 프랑스군을 방어하다가 말라죽는 것보다는 사방에서 동맹을 끌어들이고 자신도 직접 프랑스 북부를 침공해서 파리와 일드프랑스를 위협함으로써 프랑스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자 대전략이었다. 앞서 이 전략을 사용한 에드워드 1세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손자인 [[에드워드 3세]]에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통해 단련된 군사들과 [[발루아 왕조]]의 비교적 약한 정통성, 그리고 [[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나바라의 왕 샤를]]의 내부 트롤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19세기경에는 (중세에 대한 전통적인 폄훼의 연장으로)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에게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백년 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거의 모든 군사작전은 약탈물에 대한 욕심과 개인의 기분에 따른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에 불과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찰스 오만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8003877|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가 대표적이다. 무려 1885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토크멘터리 전쟁사]] 같은 현대의 역사 교양프로에서도 오만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장궁병이나 하마기사 같은 무기체계보다는 잉글랜드군의 [[https://gall.dcinside.com/m/rome/736013|행정 조직]]의 정교함과 군사작전의 전략적 타당성에 주목한다.]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중 누구도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가스코뉴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리고등법원이 항소를 수리하고 대관을 파견하고 반프랑스파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갔고 시간은 프랑스 편이었다. 1313년 보르도의 파산한 공작 정부는 필리프 4세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키텐의 '폭력, 약탈, 무정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323년 10월에는 내륙 개척지의 작은 마을인 생사르도스가 프랑스 왕의 특허를 받고 이주민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노동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 레몽 베르나르가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고 프랑스 왕의 대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리적 의심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모두 보르도의 공작 정부를 배후로 지목했고 [[샤를 4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책임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에드워드와 그의 무능한 정부 고문들이 외교적 대응이건 전쟁 준비건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1324년 7월 공작위 몰수 선언과 함께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고작 1년도 안 돼서 아키텐 공작의 영토는 가스코뉴 서부 해안의 얇은 면으로 축소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결국 항복하고 1325년 8월 이자벨 왕비와 열두 살 된 어린 아들 에드워드를 파리로 보내서 샤를 4세에게 신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 왕비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애인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프랑스에서 모집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잇따른 실정으로 런던시를 포함해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던 에드워드 2세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퇴위당한 뒤 1327년 9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