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백년전쟁/장기 휴전 (1389-1415)#s-4|프랑스의 내전]] (1407~1415) === [[파일:Révolte des Cabochiens.jpg |width=450]] >"평화 조약. 다시 평화 조약.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 >1409년 파리 고등법원 서기의 낙서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한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부르고뉴 공작은 범행을 자백하고 도망친다. 지도자를 잃은 오를레앙파는 지리멸렬한다. 용기를 얻은 부르고뉴 공작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해 오를레앙 공작은 폭군이므로 죽여도 된다는 논리로 사면을 받는다.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인 리에주 주교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나자 오를레앙파는 사면을 취소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오테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군사적 명성을 얻고 저지대를 장악한다.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로 돌아오자 오를레앙파는 저항 의지를 잃고 도망친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파의 고위 관료들을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고 정부를 공포로 장악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재무부를 숙청하고 정부 수입을 독점한 뒤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 지위와 왕세자의 신병을 양도받는다. 신임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과 동맹을 맺는다. 아르마냑파는 군사를 소집해 파리로 진격하지만 센 강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진다. 비세트르에서 또다시 이름뿐인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을 납치하면서 내전이 재개된다. 지난 가을의 굴욕에서 교훈은 얻은 아르마냑파는 선발대를 보내 센 강의 교두보를 점령하고 파리 인근의 주요 도로들을 장악한다.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센 강을 건너지만 파리 공략에 실패하고 생클루 전투에서 패배한다. 부르고뉴군은 후퇴하는 아르마냑군을 추격하며 주요 요새들을 점령한다. 절박해진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에 상당한 영토를 양보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부르주 포위전에서 부르고뉴군 진영에 전염병이 퍼지고,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와 협상해 평화 조약을 맺는다. 잉글랜드군은 아르마냑파 공작들의 영지로 진군해 약탈을 벌이며 배상금을 뜯어낸다. 잉글랜드군이 아무런 피해 없이 가스코뉴를 통해 귀환하면서 프랑스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곧 성인이 되는 왕세자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협력해 부르고뉴 공작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시 도축업 조합의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왕세자 파벌을 습격하고 정부를 공포로 통제한다. 이들 박피단은 부르고뉴 공작의 통제에서 벗어나 귀족과 고위 관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부유한 시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강요한다. 박피단의 계급투쟁으로 부르고뉴파가 분열된 사이 왕세자와 아르마냑파가 파리 시를 탈환하고 부르고뉴 공작은 플랑드르로 달아난다. 왕세자 루이는 지나치게 강해진 아르마냑파를 견제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과 협력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왕세자의 도움으로 세력을 결집해 파리 시로 진군하지만 패배하고 궁지에 몰린다. 국왕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강화한 왕세자의 중재로 또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아르마냑파는 왕세자 루이를 통제하기 위해 납치 감금한다.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아르마냑파 지도부가 믈룅 성에서 대책 회의를 하는 동안 몰래 탈출한 왕세자는 브르타뉴 귀족들의 도움으로 파리 시를 장악하고 아르마냑파를 숙청한다. 헨리 5세는 왕세자 루이의 협상 제안을 무시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