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백년전쟁/제1기 (1337-1360)#s-4|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56) === [[파일:hywchevauchee 1355.jpg |width=400]] >고귀한 에드워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 >장 르 벨의 연대기 전쟁이 재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리프 6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한다. 크레시 전역으로 전비가 바닥난 잉글랜드는 당분간 내정에 집중하면서 요충지의 요새들을 기반으로 방어전을 수행한다. 프랑스도 가스코뉴 원정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으로 전략을 수정해 국경의 요새들을 하나씩 공략하면서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아직도 프랑스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국민들은 전면전을 회피하는 전략을 정부의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이해한다. 새 국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과 기회를 찾는 야심가들은 카페 왕가의 후손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한다. 국내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에 진이 빠진 장 2세는 결국 긴 조약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가스코뉴의 주권을 양도하고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곧 카를로스 2세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조약을 파기한다. 에드워드 3세와 랭커스터 공작이 북부 프랑스에서 조공으로 프랑스 주력군의 시선을 끈다. 그 사이 흑태자 에드워드가 보르도에서 출정해 가스코뉴와 랑그독을 횡단하는 기마약탈로 남부 프랑스를 불태우고 돌아온다. 이 원정으로 랑그독에서 세금 징수가 당분간 중단된다. 얼마 뒤 흑태자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가스코뉴 전선에서 네 방향으로 동시에 공세를 가해 많은 거점을 점령하고 전선을 크게 밀어낸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늙고 지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한다.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장 2세가 시도한 개혁들은 전부 실패하거나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참다 못한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추종자들 중 일부를 처형한다. 이에 카를로스 2세의 동생 펠리페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장 2세는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에브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공은 예상된 목표인 랑그독 대신 북쪽으로 진군한다. 장 2세는 크레시 이전의 국왕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가용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야전군 편성을 가까스로 끝낸다. 흑태자는 남쪽으로 후퇴하지만 장 2세는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장 2세는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