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기(전국시대) (문단 편집) === 몰락 === '''그러나 장평대전 이후로 백기는 몰락하게 된다.'''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 범수는 백기의 은사인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양후 [[위염(전국시대)|위염]]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재상이 되었다.]가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되어 장차 있게 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 [[합종연횡|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전국시대)|소진]]의 동생으로, 위키에 항목은 없으나 형 못지 않게 활약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한 말이 그 유명한 [[어부지리]]다.]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게 [[소양왕]]을 설득해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할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를 달래게 했다. "무안군이 [[조괄|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韓·趙恐 使'蘇代' 厚幣 說 秦相 應侯 曰 "武安君 禽 馬服子乎?") >응후 범수가 말했다. "그렇소."(曰 "然.") >또 소대가 말했다. "바로 [[한단]]을 포위할 것입니까?"(又 曰:"卽 圍邯鄲乎?") >응후 범수가 말했다. "그렇소."(曰 "然.")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일흔 남짓 재를 쳐서 뺐었고, 남쪽으로 언·영·한중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단]]·[[소공석]]·[[태공망]]의 공적도 이것 만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 여기서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라는 말은 단순히 관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백기가 삼공이라 불리는 [[문공(주)]], [[소공석]], [[태공망]]과 같은 급의 공을 세운다는 중의적 의미라 한다. 전국시대의 [[펀치라인]]이라고 보면 될 듯.]("趙亡 則 秦王 王矣 武安君 爲三公. 武安君 所爲 秦 戰勝攻 取者 七十餘城, 南定鄢·郢·漢中, 北禽趙括之軍, 雖 周·召·呂望之功 不益於此矣. 今 趙亡, 秦王 王, 則 武安君 必爲三公, 君 能爲之下乎? 雖 無欲爲之下 固不得已矣. 秦 嘗攻韓 圍邢丘 困上黨 上黨之民 皆反爲趙 天下 不樂 爲秦民之日久矣. 今 亡趙, 北地入燕 東地入齊 南地入韓·魏, 則 君之所得 民亡幾何人. 故 不如因而割之, 無以爲 武安君功也.") >이에 응후 범수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於是 應侯 言 於秦王 曰 "秦兵勞 請許 韓·趙之割地以和 且休士卒.")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王聽之 割 韓垣雍 ·趙六城 以和.)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正月, 皆罷兵. 武安君聞之 由是 與應侯 有隙.) >---- >ibídem 범수의 모함 이후 한단 [[공성전]]이 실패로 끝나고, 진왕은 다시 백기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하였으나 백기는 계속 병을 핑계로 전쟁에 나가질 않았다. 이 와중에 백기는 "진나라가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분노한 진왕은 그를 귀양보내고 자결을 명한다. >진소양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 >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 >진소양왕이 응후 범수 및 여러 신하와 의논하였다. >「白起之遷,其意尚怏怏不服,有餘言。」 >「백기가 유배를 가면서 오히려 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秦王乃使使者賜之劍,自裁。 >진소양왕이 사자를 보내 검을 주면서 자결하라고 하였다. >武安君引劍將自剄,曰: >무안군이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말했다. >「我何罪于天而至此哉?」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良久,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遂自殺。 >마침내 자결했다. >武安君之死也,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무안군이 죽으니 진소양왕 50년 11월의 일이다. >死而非其罪,秦人憐之,鄉邑皆祭祀焉。 >백기가 죽었으나 죄가 없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인터넷상에서는 해당 유언을 "그런 공을 세웠는데 나를 죽이냐?"는 힐책으로[* 한마디로 "내가 너무 많은 공을 세웠으니 나를 죽인 것이 아니냐?"는 말.]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는 없다. 아마 워낙 생전에 전쟁터를 전전하던 인물이다 보니, 정치모략으로 실각 후 자결을 명령받았다고 갑자기 일생 동안 저지른 학살을 후회한다는 정황이 어색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런 가설이 퍼진 듯하다. 물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학살을 저지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나 죄책감이 남아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합리화를 해 왔겠지만, 막상 그 나라에 버림받고 나니 후회의 감정이 들 수도 있는 노릇이다. 결국 '''백기는 진나라의 [[전쟁 영웅]]이자,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학살자]]로 남았다.''' 이 유언이 진심이든 아니든 이는 훗날 환관 [[조고]]에게 살해되는 [[몽염]]의 "내가 이렇게 비명횡사하는 건 [[만리장성]]을 지으며 지맥을 많이 끊었기 때문이다."는 유언과 [[항우]]의 "내가 이 꼴이 된 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는 유언[* 사실 유언이라기보다는 마지막 [[해하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진짜 유언은 [[고제(전한)|유방]]에게로 간 자기 부하 [[여마동]]에게 한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과 비교돼, '''"그래도 자기 잘못은 뉘우치고 죽었다."'''고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몽염은 "몽염의 죄는 진시황의 폭정을 간언하여 말리지 않은 거지 지맥 탓을 하며 잘못을 회피한다."고 [[사마천]]에게 마구 까였다. 항우는 일개 장군이 아닌 통치자로써 '''현대는 물론 고대에서조차 납득 못 할 대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다녔다는 점'''에 사마천이 "제 잘못도 모르고 하늘 탓을 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했으며, 당대의 사학자들에게서도 [[정신승리]] 취급을 받는다. 물론 백성을 하늘로 본다면 정말 하늘이 망하게 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다만 몽염은 백기나 항우와 비교되긴 억울한 점도 있다. 분명 공을 세운 건 사실이고, 백기 만큼 대학살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항우는 가는 곳마다 학살을 저질렀고, 아무 죄 없는 민간인까지 적군 병사들 만큼이나 죽여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