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골단 (문단 편집) === 활동과 만행 ===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437|시사저널 1991년 5월 16일자 기사에 언급된 백골단의 일상.]] 백골단은 정복중대를 보조하여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위대를 [[:파일:20200213_013435.gif|밀어버리거나]]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반 [[경찰청 의무경찰|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나 추격을 시도했고[* 이것은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기병]]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보통 [[페퍼포그|다탄두 발사기]]나 최루탄 발사기를 통한 최루탄 발사를 신호로 돌격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으며 특정 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히면 반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공포의 부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기 ~~[[퍼슛 캅]]?~~, 집안에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출발하려는 지하철에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 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이러한 폭력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1990년 KBS 사태]] 당시 백골단 300명이 여의도 본사로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117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로는 검거한 시위자들을 인근 경찰서로 연행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교외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거나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하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된 부상자를 길가에 버려둠으로써 학생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였다. 영화 [[1987(영화)|1987]]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 진압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 정화통을 빼고 달리지 않았다. 최루가스가 만개해 정화통을 끼고 뛰었다.]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과 출신대원들의 주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루탄이 기본적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진압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중대가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하며 훈련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들은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했다.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 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다.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물론 백골단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초창기로 갈수록 백골단의 무장은 가벼웠고 그만큼 무장 시위대와 정면으로 붙으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래서 백골단이 활약하기 위해선 정복중대가 확실하게 뒤를 받혀줘야만 했다. 다만 후기로 가면서 사복중대의 무장도 꽤 튼실해졌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 안에다 철심을 박아넣어서 보강하는 경우가 많았다.],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 물론 문서 상단의 [[편곤]]처럼 사제무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직원사복중대는 지원자를 모집해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와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으며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을 가진 전의경 기동대와는 다르게 보다 자율성 있는 진압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 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이었다. 또 백골단은 일부러 폭력적으로 진압했으며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시위대도 가만있지 않고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사수대|대항조직]]이다.[* 비슷한 사례로 노조도[[구사대]]에 대항키 위해 [[http://mnews.joins.com/article/2308764|'파업자위대']]를 두었다.] 캠퍼스에서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던 1960~1970년대에도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지만 1980~1990년 이후, 그리고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사수대가 하도 강력하게 저항하다 보니 백골단도 나중에 가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사수대를 검거하려다 역으로 두들겨맞고 부상당하거나 심하게는 살해되는 사례까지 흔하게 발생했다.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NFRMS3B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RDAwMy8xLzE2OC5qcGc=&filename=3.jpg]] 백골단(사진 속 중대는 전남82중대)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