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언(기독교) (문단 편집) == 중요한 건 [[사랑]]이다 == 은사를 기록한 고전12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은사로 부르는 현상들을 서술하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밝히며 이윽고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며 고전13장으로 넘어간다. 그렇다. 크리스천이라면 히브리서 11장인 믿음 장과 더불어 애송하는 사랑 장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린도전서]] 13:1-3 (개역개정) 은사주의 운동에서 자주 오용, 오인용되는 구절이 12장 마지막 절이다. 하지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받았던 간에 사랑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밝히는 그 장이다. 방언을 하던, 예언을 하던 사랑이 없이는 무익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있어야만 방언도 예언도 완전해지고, 교회 공동체는 각각의 모양으로 각 사람이 직분과 은사를 행하지만 이를 묶어 든든히 세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선언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방언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논쟁 이전에 바울은 분쟁이 없고 서로 북돋아주는, 사랑을 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되길 간구하며 고린도 서신을 부쳤다. 즉 사랑을 부어주시길 사모하고, 너희가 그렇게 고민하고 논쟁이 있는 은사도 사랑을 따라, 사랑 안에서 하라는 현대에도 매우 간절한 가르침이다. 문맥상 자연스럽게 놓치기 쉬운 건 사랑은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은사는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확장과 내부공사를 위한 삽, 괭이와 같은 도구에 해당한다. 방언, 예언, 가르침, 베품, 기도 등 각자에게 구함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나누어 주신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열렬하게 사모해도 특정한 은사는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존 파이퍼]]는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은 가르침과 목회와 학자로서의 은사는 받았지만 동료 크리스찬과는 달리 자신에겐 방언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럼에도 기대하라는 말씀에 따라 늘그막인 현재도 기도하고 사모하며 구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람을 기적적으로 고치거나 치료하는 치유의 은사는 특정상황에 특정 인물을 돕기 위해 잠시 주어졌다가 그 사역이 끝나면 거두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이런 도구인 은사를 어떻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용하는지를 나타낸다. 바울이 사랑을 ‘가장 좋은 길’ 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체들 간의 적극적으로 하는 사랑이건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를 선대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방식의 사랑이건 이는 모든 크리스찬이 행해야 할 필수사항이기 때문에 은사의 범주엔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론 인간의 힘으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위에서부터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건 분명하며 이런 면은 은사와 흡사하다. 하지만 사랑은 열렬히 구하는 한편으로 설령 자신에게 신령한 힘이 부여되지 않은 것 같다 해도 주어진 현재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한다.[* 가령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사람을 만났다면 이에 대한 반감이 초자연적으로 부어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덮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고 축복해야 한다. 부부간 갈등과 오해,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부어주시지 않았으니 못 해요~ 같은 태도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내려받지 않으면 아예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고, 받지 않은 게 반드시 잘못인 것도 아닌 은사와의 분명한 차별점이다. 사람들은 은사, 특히 신비해 보이는 방언이나 치유 등에 시선을 뺏기는 성향이 있다. 또한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들을 영적 수준이 깊고 신앙이 뛰어난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능력을 받았다 싶으면 본인도 거기에 취해서 하나님 영광 돌리기보다 자기 앞에 신도들을 줄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거듭 말하듯이 이는 아무리 귀하다 해도 도구에 불과하며, 은사의 통로가 된 사람의 영적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필요하다면 지나가던 당나귀나 돌도 말을 하게 할 수 있는 게 주님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은사를 소유했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나로 심판받는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게 마태복음 7:23으로, 주의 이름으로 온갖 능력을 행한 자들이 항변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구원조차 받지 못했던 불법을 행한 자로 불리며 쫓겨난다. 유명한 예를 들어보면 유다가 있다. 예수께서 안수해서 능력을 주고 둘씩 짝지어 보내며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파하라 보냈을 때 제자들은 모두 파송된 대로 일을 행하였고, 최후의 만찬 때에도 묘사되듯이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로부터도 가짜라고 의심받지 않았다. 이는 즉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행해서 귀신을 쫓아냈고, 사람을 고쳤으며, 배운대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했기에 실제로 유다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으로 사람들을 전도한 유다는 정작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었다. 심지어 회심하지도 않고 자기 위치를 이용해 돈을 도적질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은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능력이 유다 개인의 경건으로 말미암지 않고 다만 복음 전파를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능력으로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경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반면 은사를 받았던 안 받았건 사랑을 행한 이들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