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파국 (문단 편집) === 전성기 (5세기 말) === 5세기 초쯤부터 급격하게 강한 세력이 등장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특징으로는 5세기 전반부로 편년되는 고분이 매우 많다는 점인데, 단일한 왕가 중심의 정권이라면 이렇게 비슷한 시기 고분이 많을 이유가 없다. 즉 여러 집단이 서로 비슷한 위계를 가지고 같은 묘역을 공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상(2013, 대가야양식 유물의 분포양상과 의미] 5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런 현상이 마무리되고, 다른 가야 지역과 완전히 구분되는 대가야 양식 [[가야토기]]가 등장하는 등 특색있는 문화를 발전해나가게 된다. 고령 왕성의 부속 산성인 '주산성'은 백제의 [[부소산성]]과 입지와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5세기에는 대가야가 한때나마 백제에 맞먹게 강성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 주산성을 중심으로 대가야 왕도를 방어하는 다수의 산성이 서로 연계된 성곽 방어망이 축조돼, 낙동강 동편 지금의 [[대구광역시|대구]] 지역까지 지배하던 신라는 이후 150년 동안 낙동강 건너 대가야를 공략하지 못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백제는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사형당하고 수도 [[위례성]]까지 잃는 등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백제를 '거의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수도가 점령당하고 왕이 제압됐으니 660년 [[의자왕]]이 붙잡힌 때와 맞먹는 큰 타격이었다. 다만 이때는 태자 문주왕이 신라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바로 재기에 성공했다.] 금관가야는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차츰 주도력을 상실해 평범한 가야소국 중 하나 정도로 떨어지고 이 시기 신라마저 고구려에게 내정간섭을 당하는 반속국으로 전락하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대가야는 이러한 한반도 남부지방의 힘의 공백을 틈타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령의 [[왕릉]]급 분묘가 모여있는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출토 철기 유물이 다른 가야 지역 고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과 양 모두 다양하고 많아서 반파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5세기 후반경에는 고령계 유물이 합천, 거창 등 인접 지역을 넘어서서 김해, 창원, 함안, 함양, 산청, 진주, 의령 등 가야권 대부분 지역에 퍼졌고, 심지어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정신없었을 5세기 무렵에 반파국은 원래 백제의 영향권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남쪽 방향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호남]] 동부 일부 지역([[섬진강]] 유역)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이 시기 호남 동부에서 백제계 유물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야 = [[경상남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5세기 전반에 먼저 대가야의 중심지 고령군과 호남 사이인 서부경남 일대([[진주시]][* 수정봉 고분군 등.], [[합천군]][* 합천 옥전 고분군], [[거창군]][* 말흘리 고분군 등], [[산청군]][* 산청읍 옥산리 유적] 등)의 대가야화를 거쳐 5세기 경에는 지금의 [[여수시]][* 고락산성], [[순천시]][* 운평리, 왕지동 고분군], [[광양시]][*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고분군], [[남원시]][*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두락리 고분군, 동면 건지리 고분군], [[곡성군]], [[구례군]], [[장수군]][*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 동촌리 고분군], [[진안군]][*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황산 고분군],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 고분] 등에서도 고령계 [[가야토기]]가 백제계 유물이나 이전의 토착 양식을 누르고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토기뿐 아니라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35호분에서 출토된 철기 축소 모형 같은 특징적인 부장품이 남원 월산리에서 나오기도 하고, 부장품이야 받아와서 묻었다고 쳐도 특히 두락리 1호분처럼 묘제까지 전형적인 대가야식으로 세장한 평면구조를 보이기도 한다. 현대 한국인이 [[양복]]을 입고 [[아파트]]에 살며 식단도 서구화가 진행됐지만 장례문화의 기본 틀은 옛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묘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락리 1호분 등에 묻힌 사람이 고령 대가야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입증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 1일]]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하면서 영호남 벽 허물기를 주장한 것도 '가야 = 대략 [[경상도]] 서쪽 절반' 정도로 학창시절에 배웠던 사람들이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 있지만 실제로 고령 대가야가 주도하는 전성기 가야는 경남권뿐만 아니라 호남 동부 지역까지 연관성이 높았다는 최신 학설을 반영한 것이다.] 물론 출토유물 고고학 양상에만 근거해서 어느 나라의 세력권을 추정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같은 이유로 [[고조선]] 영역을 동검과 토기가 어디까지 나오나로 교과서에 그려놓는 것도 최근 학계에서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이 정도로 고고학적 지표가 뚜렷하게 드러난 정도면 어느 정도 대가야의 영향력에 대한 최소한의 파악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호남 동부보다 밀도는 낮지만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신창동에서 가야금의 원형이 출토된 바가 있었는데 그게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라고 언급되었다.][* 최근 1997년에 가야금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광주 신창동과 경북 경산지역에서 발굴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이 유물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후의 것으로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319페이지, 광주 점등 1호 석실묘], [[부안군]][* 이희준 "대가야고고학연구" 제5장 대가야 토기 양식 확산 재론, II. 대가야 토기 양식, 1. 대가야의 의미와 토기 양식, 그림 1. 대가야양식 토기 출토 지역 관련 수계 개념도], [[해남군]][*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94페이지, 해남 황산리 분토유적], [[나주시]][*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146페이지, 나주 가흥리 신흥고분]까지 대가야계 유물이 소수 출토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가야는 이 섬진강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산성]]과 [[봉수대]]를 촘촘하게 깔아서 체계적으로 지켰다. 전북 [[장수군]], [[완주군]] 등지의 전북 동부 지역에 [[가야]]의 봉화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이 전북 동부 지역 봉수대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다수 출토되기도 했고, 고려 이후 수도가 중부 서해안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이 전북 동부 지역은 고려나 조선이 봉수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경로였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봉수대가 아닌 가야의 봉수대임을 알 수 있다.[[https://youtu.be/pq1KSF--Mj8|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백제가 이 호남 동부를 그냥 내버려둔 건 아니었다. 반파국보다 분명 반수 아래급이었을 망정 호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분명 어느 정도는 융성을 자랑했기 때문. 이런 영산강 유역 세력이 호남 동부로 전혀 뻗어나가지 못한 건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감시 탓이었다. 반파국 같은 비마한 계열이야 교역 정도로 만족한다면 후기 마한 영도국인 [[백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였으나,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지위 자체를 한때 정면 부정한 바 있는 영산강 유역 마한 신미국 세력이 같은 마한 소속인 호남 동부까지 장악한다면 백제국은 마한 통합 이데올로기 자체에 크게 생채기를 입는 판이었다. 다만 [[침미다례]]가 근초고왕 남벌 기사에서 비하용어인 '[[남만]]'으로 표현된 건 이들의 문화가 딱히 이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백제국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성백제]]는 우리가 흔히 백제 자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원래의 공주부여 일대 문화권, 즉 경기충청전라 내륙부 토광목곽 혹은 석곽묘계 집단과 거리가 멀었고, 이들과 직접적으로 근연 관계가 있는 집단은 전라 서남해안 일대에 자리잡은 토돈분구묘제 집단, 즉 바로 이 [[침미다례]]였다. 침미다례는 토돈분구묘제 집단이 우위에 선 가운데 토광목관묘계 집단과 연합한 형국이었으니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마한 주류 집단과는 토광목관묘계 집단을 통해 연관이 있었으나, 한성백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때문에 애초엔 마한 내부 논리로 따지면 한성백제가 바로 비주류 후발 외래 집단이었다. 다만 우연히도 마한 주류가 하필이면 백제국과 가까운 충청도에 주로 자리 잡은 탓에 한성백제한테 훨씬 일찍 병탄당했을 뿐이다. 한편 재미있게도 한성백제(고구려식 적석총+토돈분구묘제) 및 목지국 마한 주류 집단(토광목곽-석곽묘) 모두와 고고학적으로 밀접하게 관련 있는 집단은 오히려 침미다례(토돈분구묘제+토광목곽-석곽)이다.] 한편 호남 동부는 이미 4세기부터 소가야와 거래를 텄고 5세기에는 아라가야, 6세기에는 대가야와 거래를 터서 이들 대가야 연합과의 교역을 통해 차차 성장하고 있었다. 호남 동부의 고고학적 발전 속도는 백제와 가야는 고사하고 아예 호남 서남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미발전 지역이었으니, 평소부터 오랜 거래 관계로 이 지역을 잘 아는 대가야가 백제가 어려운 틈을 타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백제 변방 영역을 침범한 셈이지만 웅진천도 초기 백제가 워낙에 내외로 혼란스러운 상태라 일단은 묵인했는지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관계는 한동안은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 국력을 수습한 [[무령왕]]대에 들어서야 이 지역을 다시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직할령으로 다스린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하는 지역 학계에서는 대가야와 다른 독자적인(즉 영향을 받는 정도) '장수가야', '운봉가야' 등 명칭으로 호남 동부의 가야 문화를 정의하려 하기도 한다. [[서해]]에 면한 지역인 [[부안군]]에도 조선시대 고지도에 가야포(加耶浦)라는 지명이 전하는 것과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대가야 계통 유물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일시적으로라도 가야 세력이 서해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http://www.ibuan.com/news/articleView.html?idxno=5128|#]] [[주보돈]] 교수는 이 루트를 4세기 후반부터 이어져온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 관계하에서, 섬진강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사용한 통로로 추정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역 통로를 동맹이라지만 어쨌든 외국인 백제에 크게 의존하는 점은 대가야에게 꽤 부담으로 다가와서 섬진강이란 대체 루트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던 [[섬진강]] 유역을 얻은 것을 통해 남방 해상을 통한 중국, 일본 등 외부 교역도 놓치지 않아 동쪽에서 금관국의 쇠퇴와 신라의 강성으로 잃어버린 [[낙동강]] 수로를 대체할 수도 있어서[* 대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경에는 신라가 낙동강 동쪽을 전부 장악해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가 마음놓고 낙동강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영역인 대구에서 낙동강을 건너 고령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대가야가 수도를 지키기 위해 철저히 요새화해 틀어막은 수준이었다.] 479년에는 [[하지왕]](荷知)이[[황해]]를 건너 [[중국]] [[남제]]에 단독으로 조공사신을 보내 백제나 신라와는 차별화되는 독립적인 지배권력의 존재를 알리고 '보국장군 본국왕' 작호를 하사받았다. 사실 당시 중국 남조는 [[송(육조)|유송]](劉宋)이었는데, 마침 대가야가 사신을 보낸 그 해 송의 [[권신]] [[소도성]]이 [[황제]]를 칭하고 [[제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하지왕의 사신 파견은 의도적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제나라의 건국을 축하하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이는 가야가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낸 유일한 사례. 양직공도에서 다른 가야 국가들이 백제에 딸려서 겨우 조공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신라조차도 중국과 직접교역을 전혀 못하고 있었던 것[* 이후 서해안 항구를 획득한 [[진흥왕]] 이후에나 중국에 직접교역을 시작한다.]을 생각하면 이는 독보적인 것이다(다만 6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압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일본|왜국]]이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 대장군'으로 책봉받은 데서도[* 실제로 왜국이 신라 등등 저 범위를 모두 제압하고 있어서 저런 작위를 받은 게 아니라, 동쪽 한반도 정세를 잘 모르는 제3자인 중국 남조에 뻥을 친 것이다. 심지어 저 중에 [[진한]], 모한은 5세기에는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왜국은 저 작위에 심지어 '백제'까지 포함시키고 싶었지만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은 중국도 평소에 백제와 교역을 꾸준히 해와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포함된 작위 요청은 거부하기도 한다.] 자극을 받은 듯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212년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가야' 기록이 481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반파국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결과물로 풀이된다. 게다가 중국뿐 아니라 일본 방면으로도 교역에 나서서, 5세기부턴 대가야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김해]]가 일본과 가깝다는 위치상 당연하게 [[금관가야]]가 맡아왔던[* 몇백 년 전 [[변한]] 시절부터 일본 방향으로 가려면 김해 구야국([[금관국]])을 거쳐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왜국 방향 교섭마저 대가야가 주도권을 빼앗은 정황도 나타난다. 신라 [[눌지 마립간]]이 454년경 신라 땅의 고구려 군인들을 몰살시키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나제동맹]]으로 외교 관계가 재편된 뒤에도, 백제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나제동맹]]으로 막아내는 데에 급급했으므로 이 시기 가야와는 그리 큰 노골적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주변과 별 충돌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 시기 가야 동향에 대한 기록 자체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5세기 후반 고령은 큰 규모의 고분이 집중 조영되고 있고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많은 사람을 [[순장]]할 정도로 대가야 국력의 최전성기임을 알 수 있다. 481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수도 경주 인근 미질부(지금의 [[포항시]])까지 진군하자 백제와 함께 원군을 보내서 신라군을 도와 막았다. 원래 대가야와 신라는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때는 고구려가 신라를 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서라벌 털고 멸망시킬 기세로 내려오는데 신라가 아예 없어져버리고 고구려와 국경이 닿으면 가야에게도 부담이니까. 아무튼 이제 국제 관계에서도 삼국에 이은 제4의 세력, 정치적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496년에는 희귀한 흰 [[꿩]]을 신라에 보내 호의를 표시하고 적당히 친신라 정책으로 정세를 유지했다. 경남 합천군 저포리 고분군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에서 하부(下部)란 글자가 발견되었고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긴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는 것은 반파국은 왕을 대왕이라 불렀으며 대가야 내부의 통치를 위한 위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에서도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까지 대형의 [[왕릉(무덤)|왕릉]]들이 열상(列像)으로 나란히 배치되기 시작한다. [[왕]] 또는 최고 지배자들의 묘역이 분리된 것으로 왕권의 강화 나아가 [[성읍국가]]를 넘어 초보적인 고대국가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고령, 합천 일부 지역이 포함된 왕도를 신라의 [[6부]]처럼 여러 부로 나누어 편제하고[* 조사된 명문은 하부(下部)뿐인데, 하부가 있으면 당연히 상부도 있을 것이라 상정할 수 있다. 백승충 교수는 [[우륵]] 12곡의 상가라도와 하가라도가 상부와 하부 2부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았다. 혹은 상부, 중부, 하부 3부 체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생겨난 점, 대가야식 금공위세품의 분배, 대가야 산성의 분포를 통해 추정되는 대규모 역역 동원 체계 등으로써 고대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나 계명대 김세기 교수 등이 대가야 고대국가 진입을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