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파국 (문단 편집) === 성립기와 중심지 === 반파국이 자리잡을 오늘날 [[고령군]] 지역은 [[고인돌]] 유적을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살기 시작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 조사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변진]]조에 나오는 변진반로국이 기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기록상으로 국가 이름이 거의 흡사하기 때문. 반로국(半路國)/반파국(伴跛國). 이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한자를 오기하는 것은 전근대 기록에서 흔한 일이다.] 변진반로국은 지금의 대가야읍이 아니라 회천 건너편인 [[개진면]] 양전리, 반운리 일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반운리에 있는 높이 129m의 낮은 언덕인 독산 정상에는 2~3세기의 철제 농경 도구, 철제 무기, 목곽묘가 조사 결과 드러났다. 여기서 출토된 와질토기는 [[부산]] [[노포동]] 고분군이나 [[울산]] [[웅촌면]] 하대마을 유적과 양상이 비슷해, [[낙동강]]을 타고 타 지방과 교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소국체는 일찍부터 성립됐지만, [[변한]] 시절부터 초기 가야를 [[김해]] 지역의 [[금관국|금관 연맹]]이 주도하던 시절에는 고고학적으로 4세기 이전 목곽묘 계통 분묘의 규모와 부장품의 양으로 볼 때 김해에 비해 매우 초라한 정도라 이후처럼 가야를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라 흔한 여러 가야 제국(諸國) 중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김해 금관 연맹이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상당히 붕괴당한 즈음부터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좀 더 이전 시기부터 금관 연맹이 이미 패권을 잃었다는 설이나,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로도 어느 정도는 금관국의 전성기가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 혹은 주보돈, 유우창, 권주현 교수 등의 소수설로는 광개토대왕이 공격해 굴복시킨 '가라', '종발성'이 김해가 아니라 고령의 이 나라를 말한다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이 경우 김해의 상대적 하락세와 대가야가 부상하는 시기를 통설보다 빠르게 잡은 것.] 5세기 이후 고분에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 동시기 김해 지방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진다. 이렇게 금관국의 몰락과 반파국 부흥의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금관국의 유민들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변하는 묘제나 토기 양식은 금관국과 여전히 차이가 있어 일부 고급 제철기술자의 유입은 있었을지 몰라도 주류는 어디까지나 원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 지역은 기존의 맹주(로 여겨지는) 김해와 거리가 멀고 중국과 가까운 선진 지역인 [[고구려]]나 [[백제]]와는 가까우며, 훗날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논이 기름지고 생산성이 좋은 땅이라 극찬한 땅인 만큼[* [[조선]] 후기에 볍씨를 뿌리면 보통 지역에서는 3~4배의 수확을 거두지만 고령 지방에서는 13~14배의 수확을 거두고, 이 지역은 가뭄 피해를 잘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야권 다른 나라에 비해 땅의 조건부터가 좋았다. 반파국이라는 국명 또한 주로 초기에 쓰이던 이름으로, 400년 이후 원래 가라라는 이름을 쓰던 김해 금관국이 약체화되자 그 이름을 뺏어와 가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고 보여지는데[* 대신 금관국은 이때부터 남가라 등의 이름으로 기록에 나온다.] [[지산동 고분군]] 발굴 당시 특히 이 시기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어서 반파국의 국력 신장을 나타내고 있다. 본래 반파국의 중심지는 [[낙동강]]가에 가까운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와 반운리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후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로 천도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학설.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초교 운동장 구석에는 대가야의 왕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정이 남아 있으며, 1977년 발굴 결과 우물 밑바닥에서 대가야 양식의 목긴 항아리와 적갈색 안질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 남쪽으로 500여미터 떨어진 고령 향교 옆에는 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왕궁 터라고 추측된다. 1910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이곳 일대를 조사하여 기와 조각을 발굴했고, 2000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축대 근처를 발굴한 결과 부뚜막 2기와 대형 건물터, 그리고 500년 전후 시기의 사발, 그릇받침, 접시 뚜껑 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여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21세기 들어서 다시 고고학적 조사를 해 본 결과, 대가야궁성지로 알려진 지점 북쪽의 평탄한 땅에 토성 유적이 발견되었다. 주소는 연조리 594-4번지로 이곳을 대가야 왕성의 일부로 추정했다. 여기서 U자형 [[해자]]와 해자 밖 경사면에 3열의 석축, 돌 사이에 판축식으로 흙을 다진 토성이 확인되었다. 다만 맞더라도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오랜 세월 교란돼 왕성임을 직접 증명하기엔 미흡하다고 한다.[* (재)가온문화재연구원, 2017, 고령 연조리(594-4번지) 단독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학술자문회의 자료집(2017.6.16).] 한편 이 시기쯤인 [[일본서기]] 기록상 262년[* 통설은 이갑자를 인하([[이주갑인상]] 문서 참조)하면 382년이고, 다른 설로 삼갑자를 인하하면 442년이 된다.] 백제와 유착한 왜인 장수 [[사지비궤]]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왕실이 백제로 도망치고 백제 장수 [[목라근자]]가 대신 출진해 가라를 회복시켜 준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서기]]에서 수식어 없이 '가라'는 보통 반파국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사건을 반파국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금관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교차검증]]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 적당히 걸러 듣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