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유대주의 (문단 편집) === 고대 ~ 근세 === >[[본티오 빌라도|빌라도]]가 "도대체 [[예수|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 가며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유대인|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 >[[마태오의 복음서]] 27장 25절. ([[공동번역성서]]) 역사적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유대인을 [[예수]]와 [[사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이라며[* 예를 들어, 투석형으로 순교당한 [[사도행전]]의 [[스데반]], 채찍질 당한(고린도후서 11:24) [[바울]]이 있다.] 증오한 것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물론 단순히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그러는 것은 아니고, 유대인들의 강압에 못 이겨 예수의 십자가형을 선고하며 자신은 이 일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본티오 빌라도|로마 행정관]][* 이 때 손을 씻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보기만 해도 알겠지만 이는 '자신은 이 악행과 무관함을 증명'하는 행동이다.]에게 유대인들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라고 발언한 부분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역사가들 중엔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전부터 반유대주의의 감정이 꽤 널리 퍼져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다신교 문화권의 사람들은 다른 민족의 신들에 대해서도 크게 부정하지 않는다. [[다리우스 1세]]가 [[아폴론]]에게도 참배했다거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고 널리 활용한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일신교인 유대인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이라며 증오했으니, 그리스인들에게 항상 미움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 처형을 주장한 유대인들은 소수로, 이들은 사람들에게 죄를 멀리하라고 만든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은 부패한 자들과 그 추종자들로, 뒤틀린 선민사상과 율법을 통한 공포로 대중들을 지배하던 자들로, 유대인을 전부를 대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부패하지 않은 종교인들과 지식인, 랍비들은 예수의 뜻을 지지하였을 것이다.] [[파일:Burning-Jews.jpg|width=400]] [[십자군 전쟁]] 기에 서유럽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 유대인 학살의 한 장면. 십자군은 이를 '내부 정화'로 여겼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및 [[중세 시대]]와 [[동로마 제국]]의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와 [[남유럽]]에 흩어져 살면서 다른 민족들을 깔보고[* 유대인 공동체의 전통 문화와 고유 종교를 최고로 여기고 그런 관습을 자랑했기 때문에 지중해 경제권에 속한 모든 지역에서 대우가 안 좋았다. 이집트에서는 유대인 남자들을 태어나는 사람들까지 죽이기도 했고 그리스 등에서도 학살을 하도 당해서 본래 부계인 혈통이 모계로 변했을 정도다.] 돈만 밝힌다는 [[편견]]과 미움을 샀다. 사실 이것은 중세 유럽인들이 자초한 것인데, 애초에 유대인들이 제대로 된 일조차 구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한 것은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뜨내기 소수민족이라 자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을 아예 못하게 했고 어쩌다 토지를 소유하더라도 그냥 몰수해버렸다. 그래서 유대인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정착해 사는 것이 어려워 안전 자산인 현금을 선호하는 관습이 생겼고, 그나마 허용되는 직업은 기독교 사회에서 이미지가 나쁜 돈을 만지는 일인 [[상업]][* 전근대 사회에서 상인은 도둑, 사기꾼과 동일시될 정도로 이미지가 나빴다. 동아시아에서도 상인이라는 말 자체가 상나라가 망한 후 유민들이 토지소유권을 빼앗기고 유랑하면서 물건을 매매한 것에 대한 멸칭에서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싼 물건을 비싸게 팔아먹는 부도덕한 직업이라는 평가를 받은 상업이 누명을 벗은 것은 근세의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의 발견 이후의 일이다.]을 대신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세리]], [[마름]]같은 직업이 대표적인 유대인의 직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인종의 금융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뇌물]]과 같은 금융 분야의 [[모럴 해저드]]에도 연관하게 된다.][* 반면 이슬람의 교리상 돈벌이를 종교적으로 금기하는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보다는 주로 의료업에 종사하였으므로 이미지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종사한 금융업은 제2, 제3 금융업이었으며 불법과 탈법의 경계에 선 고리대금업이었다. 당연히 제1금융업에 비해 떼먹히기 쉽고, 욕 먹고, 귀족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은 필수이고, 이 모든 것들이 높은 이자로 나타나게 된다. 애시당초 농업, 군직, 관직 등에 종사하는 건 금지했으면서 금융업은 풀어준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 매우 영세한 규모였다. 유대인들에게 대부업을 합법화한 것은 1515년 교황 [[레오 10세]]의 피에타 법을 통해 연 5%까지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클 수도 없고 중세 말에서 근세 사이 유럽에서 가장 금융업이 발달했던 지역은 엄연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 북서부 [[카탈루냐]] 지역으로 해당 지역의 은행들이 현대 금융업의 시초로 유대인들과 상관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이 [[기독교]]인보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0111835291|더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사채업으로 배를 불린 이야기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인 [[보카치오]]가 저술한 책인 [[데카메론]]에서도 수시로 언급될 정도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은행]]인 [[성전기사단]]도 은행업과 더불어, 사채꾼 노릇을 너무나도 악랄하게 한지라서, 열받은 [[교황령]]과 [[프랑스 왕국|프랑스 왕실]]에 의해 14세기 초에 파문을 당하고 깔끔하게 토벌당했다. [[가톨릭]] 교회의 지원 하에 세워진 [[기사단]]의 횡포가 일개 사채업자들을 쌈싸먹을 정도로, 폐단이 범국가적으로 심하게 발생한 것이다. 실상은 유대인 사채업자에 의한 횡포는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나 발생한 거고, 그나마도 후술할 내용처럼 [[기독교]] 신자들이 운영하는 [[은행]]들을 상대로는 게임이 안되는 데다, 자칫 자신들이 박해당할 빌미를 줄 위험때문에라도 대놓고 갑질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경제사학자들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은행들 중 하나인, 1408년에 설립된 산 줄리오 은행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로 보기도 한다. 물론 정설은 훨씬 뒤에 설립된 [[네덜란드]] 정부 산하의 [[공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것이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정도로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끄는 금융업계가 고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은행]]은 단 한 곳도 없었고, 유럽 내에서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은행은 [[중세]]도 끝난 18세기에 설립된 [[로스차일드]] 은행이었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유대인'이라는 편견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유대계 자본이 [[은행|제도권 금융 시장]]에 진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채업을 한 것이고, 당연히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계 자본이 운영하는 [[제1금융권]]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은 유대인을 [[사채업자]]로 비추는 반유대주의적 관념이 투영된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유대인들은 중세 시대부터 지정된 구역([[게토]])에 살며 게토 외 지역의 외출도 제한당했고, 유대인이라는 징표로 뾰족한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더불어 십자군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고 [[흑사병]] 창궐 당시 유대인들이 독을 푼다는 소문이 돌아 학살당하기도 해서 교황이 직접 보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는 수많은 사적 린치가 빈번했다. 이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그나마 약해졌지만, 그것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는데 예로 [[스페인]]의 국왕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조상이 유대인일 경우 본인이 [[가톨릭]] 신자라 할 지라도 군인이나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는 스페인이 유독 강한 가톨릭 순혈주의가 나타난 국가인 것도 한몫을 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페인은 지방색이 매우 강한 국가인데 당시에는 그 지방색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로 묶을 수 있는 요소는 가톨릭 뿐이었다.] 다만 [[폴란드]]는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고 그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이주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마르틴 루터]]도 반유대주의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유대인들은 어린아이를 해한다는 음해([[피의 중상]])를 받기도 했다. 유럽 뿐 아니라 이슬람 국가들에도 반유대주의가 있었다. 심지어 무슬림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 당시 무슬림과 조로아스터교도 및 기독교인과 유대인 상인들이 황소 반란군에게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했다. [[아프리카]]나 [[일본]], [[중원]], [[동남아시아|동남아]]에까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걸 보면 여기서도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다만 [[황소의 난]] 당시 학살 당시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경우 유대인 상인들만 골라 학살당한건 아니기 때문에 정황상 반유대주의로 인해 유대인을 학살한건 아니다. 당시에 동양에서 유대인의 존재를 알고나 있었는지도 불명이다. 동양인들 입장에서 외국인이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media-1.web.britannica.com/8469-004-663DBC17.jpg]]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랍비이자 [[살라흐 앗 딘]]의 주치의였던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그나마 이슬람권 중에서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에서는 종종 관리로 등용되었는데, [[아글라브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시절에는 유대인들이 관료로 등용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인 [[후우마이야 왕조]]도 대부분의 기간동안 유대인을 우대해 주었다. 애초에 [[이슬람 제국]]이 성공할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슬람 제국이 타종교에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종교적 순수성을 외치며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을 대거 추방하였는데, 이렇게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로 가서 바르바리 해적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이 때까지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스페인 제국]]의 라이벌인 [[오스만 제국]]으로 가기도 했다. 유대인을 받아준 황제 [[바예지트 2세]]는 유대인을 추방한 부부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를 보고 "자기네 나라를 가난뱅이로 만들고 우리나라를 부유하게 해주는 [[반어법|아주 현명한 군주]]"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다만 스페인 제국이 몰락한 것이 스페인이 유대인들을 추방해서 그렇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을 추방한건 스페인 제국 이전의 일이었다.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적 행위'를 구분해야 하며, 따라서 1800년까지 '반유대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맥스 I.디몬트[* 2019, <책의 민족>, 466쪽부터. 교양인 출판.]를 참조하기 바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