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서방 (문단 편집) === [[이슬람|이슬람권]] === 중동의 무슬림들은 타종교나 타종파에 배타적이고 그것들을 이단시했지만 이는 반서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 이슬람 교리 자체는 유럽과 무관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나폴레옹 침략군을 무찌르자" 같은 감정 대신에 '미개한 줄로만 알았던 서구의 과학기술이 이슬람권을 압도한다는 충격'의 여파가 더 컸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이 무찌른 맘루크들과 이집트 현지 아랍인들 사이의 이질감 및 갈등도 없지 않아 작용했다.] 19세기 초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들은 [[서양]]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보다는 서구 문물을 배우자는 입장이었고, 심지어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흡사한 형태 즉 서구의 유물론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출현하여 번역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번역 도입 소개하여 다른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들로부터 불신자니 미친놈이니 욕을 먹었던 [[사이드 아흐마드 칸]]이 있다.] 20세기 초에 영국, 프랑스가 중동을 식민통치하고, 직접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BP plc|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패니]]가 이란 [[카자르 왕조]]를 비공식적으로 식민화하는 사례 등으로 중동 전역에 반서방 감정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 지식인들 중 [[하산 알 반나]]의 사례처럼 [[블라디미르 레닌]]의 [[레닌주의]]에 경도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중동에 현대적인 의미의 반서방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아랍민족주의]]자들, [[이슬람주의]]자들은 나치 독일, 스탈린 이후 소련이 퍼트리는 [[반유대주의]], 반서방주의를 수용했다. 20세기 초에 [[나치 독일]]과 협력하고 20세기 중엽에는 [[이스라엘]]의 건국 및 중동전쟁의 대패 이후 큰 충격을 받은 아랍권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제1세계]]를 반대하고 있다. 이때부터 [[아랍인]], [[이란인]]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서양과 다른 정체성이라고 분리하여 인식한다. 즉 이 때부터 [[사이드 쿠틉]] 등의 이슬람주의 사상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심플하지만 논리적 비약이 있는 반서구=이슬람이라는 공식이 본격적으로 확립된다. 냉전 이후에도 [[이슬람 극단주의|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반서방주의를 내세워 테러리즘을 정당화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반서방주의는 이슬람권 자체의 역량 강화보다는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파키스탄 정부의 학교 건설과 문맹 퇴치를 반대하는 등 혹은 탈레반의 폭정 등 우민화 정책에 악용되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 "타락한 서구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선 안된다."라는 슬로건으로 파키스탄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카슈미르 해방을 위한 성전을 주장하며 스스로 반정부주의자라고 직접 감옥에 수감되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는데, 파키스탄 군부는 이런 반서방 포퓰리즘을 악용하여 학교나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돈을 대부분 국방비에 몰빵하였다.[* 건국 초반에는 파키스탄이 국가 예산이 부족하여 이런 문제가 정당화되었을지는 몰라도, 문제는 이후 미국에서 [[페샤와르]]의 공군기지를 빌려쓰는 대가로 파키스탄의 상당한 액수의 원조금을 지불하면서 재정이 넉넉해진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 국가 예산 절반 이상이 국방비로 할당되었는데 이렇게 들어간 국방비는 "[[방산비리]]는 생계형 비리"라는 논리 말마따나 대부분 다시 영국, [[스위스 은행]] 등으로 빠져나간 것은 물론이다. 여성이 [[부르카]]를 쓰지 않고 대학에 다니는 것이 타락의 증거라고 주장하던 아불 알라 마우두디 역시 파키스탄 군부독재자들의 보은 아래서 [[뉴욕]]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뉴요커]]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신학은 그의 사후에도 [[탈레반]]의 사상으로 직접 계승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랍권의 반서방주의가 항상 실패한 결과만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는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이 가능했다. 이슬람권의 반서방주의의 문제는 이슬람권의 문맹 퇴치 등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서방주의 이데올로기가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악용된 것에 있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은 이슬람주의자들의 간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들이 독립 전쟁에 적극 참전하면서 권리를 보장받음과 동시에, 독립 이후 알제리 정부가 근본주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어느정도 성공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 수준의 최악의 혼란은 피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서양의 식민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고 영국, 미국의 후원으로 성장했지만 국내에서 반서방을 선동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사우디 왕가의 권력과 우민화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있어서이고[* 추가로 빈살만은 탈미화를 추진하여 미국의 경제 의존도를 줄이겠다고 밝힌 바가 있다.] 사우디 상류층들은 현재까지도 친서방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