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봉사건 (문단 편집) === 궈쑹링의 몰락 === 12월 20일 궈쑹링은 신민을 점령하고 만주의 원로들에게 통전을 보내 장쭤린을 교육을 파괴한 죄, 여론을 억압하고 자치를 파괴한 죄, 과도한 징병으로 농촌을 해친 죄, 용인이 공정치 못한 죄,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개인 축첩으로 민중에게 해를 끼친 죄를 성토하며 자신이 장쭤린을 단죄하고 새로운 동삼성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음날인 12월 21일, 궈쑹링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일본의 방해로 곽군의 진격이 정체된 사이, 시간을 벌어 우쥔성의 흑룡강 부대를 받은 봉천군은 크게 증강되어 궈쑹링 부대의 2배가 넘었고 궈쑹링에게 없었던 우수한 기병대가 존재했다. 포병 전력은 궈쑹링이 우세하였으나 일본은 즉각 장쭤린의 포병 전력을 증강해주었다. 봉천군 포병사령부 참모장 료안방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궈쑹링의 반란으로 당시 봉천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포병 14단이 장쭤린 포병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 부대를 주축으로 전투를 하였고 또 포병 부대에 있던 포병 인원을 전부 끌어다가 사용했다. 대포는 마차에 실어 진지로 운반했으며 매 포분당 포탄 300발을 직브했다. 한번 쏘고 나서는 쉬게 했다. 동시에 장쭤린은 또 일본인 포병을 고용했다. 이때의 일본인은 약 200여명이었으며 장쭤린의 고문 아라키가 봉천 지역 내에서 찾아온 제대 군인들이었다. 일본군은 또 대량의 군 장비와 탄약 등 2개월이나 사용할 수 있는 양을 봉군에게 지원해주었다.|| 12월 23일 새벽, [[우쥔성]]의 2개 기병 사단이 궈쑹링의 후방기지인 백기보를 습격하여 군량미, 군수물자, 탄약 등을 불태워버림으로 궈쑹링 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민의 사령부가 점령당했다. 관동군이 장쭤린의 편에 선 것이 확실해지자 궈쑹링의 부대 내부에서 탈영, 배반자가 크게 늘었다. 배후를 지원해줘야 할 펑위샹 등도 자기들 내분에 투닥거리느라 도움이 전혀 안됐고 결국 궈쑹링 부대는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12월 24일 아침, 궈쑹링은 고급 장령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여 일부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겠다고 선언했다. 제운에게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구방자로 철수하라고 지시했고 자신도 떠났다. 추작화가 본부 참모장과 동북 국민군 총사령부 명의로 각군에 공격 정지 명령을 내린 후 장쭤린에게 급전을 보내 궈쑹링이 달아났다고 알렸으며 장쉐량에게도 전화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패주하던 궈쑹링은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5일 요하에서 처형되었다. 궈쑹링의 죽음에 대해서는, [[궈쑹링]]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