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미 (문단 편집) ==== [[대한민국]] ====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군정]] 시기에 빚어진 반탁 운동과 [[대구 10.1 사건]],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주권 침탈 및 식민지화를 묵인했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주권 침탈을 묵인한 국가는 미국만 있는 것은 아니며 가쓰라 태프트 밀약 체결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던 영국을 비롯하여 당시 식민제국이었던 유럽 국가들도 있었다.]는 것도 원인이다. 아이러니한 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을 무너뜨린 게 [[미국]]이었다. 반미주의자들에게 제일 큰 원인은 항복한 일본군의 [[한반도]] 철수 이후에 [[서울]]에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하여 새로운 점령군 행세를 시작하며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했다는 것으로,[* 여러 이유가 있다. 일본 본토는 완전히 미국에게 패망했지만, 만주와 붙어있던 한반도는 위에서 하나라도 떡고물(공산국가 늘리기)을 먹으려던 소련이 내려오고 있었다.] "전쟁은 일본이 일으켰는데 왜 일본이 아닌 한국을 분할했는가?"처럼 반미주의자들에게 가장 좋은 명분이 됐다. 그래서 남북통일을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자는 이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 외에도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을 껄끄럽게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좌익]] 세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고 미국의 도움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면서 반미의 목소리는 쑥 들어가게 된다. '''미국은 [[6.25 전쟁]]에서 자국의 수만명의 젊은이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 남한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미군과 한국군]]이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북한군]]보다 더 많은 학살 및 피해를 냈다는 [[불편한 진실|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 이는 물론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및 한국군의 전쟁범죄는 반미감정의 이유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전쟁 이후 남한 내에서 대부분의 좌익계열들이 씨가 마른 상황과 반공주의 성향의 독재정권 치하에서 해당 문제를 언급하는 건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비난으로써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이후 전쟁범죄를 겪은 유족들의 목소리가 사실상 입막음되었던 예가 있다. ] 게다가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력, 군사력 모두 열세에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나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전략적인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6. 25가 끝난 이후로 매우 좋아져서 [[이기붕]] 일가가 자살한 이후에 흥분한 군중이 이기붕의 집을 습격하다가 이기붕의 집에서 성조기가 나오자 주위가 순식간에 숙연해지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 성조기는 사건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방한했을 때는 당시 서울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릴정도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대거 동원되었을 때도 당시에 다른 국가들에서 반전(反戰), 반미 의식이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은 그런 움직임이 미미했다.[* 거기엔 단순히 미국과의 감정 문제만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공세를 받은 남베트남을 과거 북한의 침공을 받은 남한과 동일시하는 정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한 단독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군부 독재 세력들이 모든 면에서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북쪽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가 "일본이 백년의 적이면, 중국은 천년의 적" 드립을 치는 것처럼, 남쪽의 독재자들 또한 미국과 의견충돌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외교#s-4|'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외교'문서 4.미국과의 관계악화 문단]]과 아래의 6.29선언에서 미국 정부의 개입, 후술할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당선에 축하논평 내용 등의 사례가 있다. 또 과거에도 미군 보초의 총기남용과 각종 월권, 무단침입자 가혹행위로 미군에 대한 시선이 안 좋았다. 부대 주변에서 깡통을 줍던 임산부가 강간당하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미군에 의한 성범죄, 주변 송유관에 앉아 있다가 미군 권총에 3살 아이가 죽은 사건, 부대 무단 침입자에 대한 가혹행위, 11살 아이가 부대안에 무단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되어 미군병사가 휘두른 대검에 팔과 무릎을 찔리고 못질한 나무상자에 넣어진 채 의정부 3군단으로 택배마냥 보내졌던 엽기적인 김춘일 린치사건, 동두천 여인 삭발사건, 파주 린치사건, 파주 나무꾼 사살사건 등으로 '''[[주한미군 범죄|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들이 잊을만 하면 터졌다.]]''' 또한 미군의 총기남용, 월권 행위가 잇따라 터져서 [[주한미군]]을 '''서양 귀신'''이라 부를 정도였을 만큼 미군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나빴다. 심지어 1961년 2월 8일 장면 내각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717|'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체결했는데, 협정 내용 중 원조당국 대표에 대한 외교관 대우 인정 등 불평등한 조약이 있어 논란이 됐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 정부에 대한 감정이 극에 달하자, 1961년 초에는 '한미경제협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390|최초로 반미 성격을 띤 집회를 벌였고,]] 서울대생 1,000명이 책임자를 엄단하고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라는 시위를 하다 연행됐다. 이후 고려대생 2천명이 같은 구호에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고, 전국민적으로 지지를 받자 이례적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공개사과를 함과 동시에 [[백악관]]에서도 사과 성명을 내놓았다. 그 때 5.16 군사쿠데타로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였으나 이번만은 관대하게 봐준다며 구속학생들을 석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이 1964년 [[6.3 항쟁]]과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회담 반대투쟁 편]과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95p] 소련과의 대치 구도 속에서 극동아시아 방어선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던 미국은, 한일 양국을 협박하여 조속히 국교정상화 작업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가 얼렁뚱땅 넘어가게 되자 민주화 세력에서 반미주의자들이 대거 양산되는 원인이 된다. 그래도 유신정권 시기까지만 해도 반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친미 성향인 사람들이 상당수 많았지만, 5.18 이후로는 미국에 대한 분노 감정이 심화된다. 5.18로 인한 반미감정을 간략하게 요약을 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와 [[전두환]] 장군이 군대로 시위를 진압하며 정권을 잡자, 사람들은 당연히 "민주주의 수호자"인 미국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가 불과 반 년 전까지 인권외교와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박정희]]를 견제했던 터라 이번에도 카터가 나서줄 것이라며 미국의 개입을 기다렸지만, 미국과 지미 카터는 반 년 전과 달리 전두환의 폭력에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하며 미국이 독재자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고 외국 정상으로서 처음 만난 것이 전두환임을 보며 민주주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던 미국에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면서 반미 감정은 심화되었다.[* 하지만 독재자 전두환을 만난 것은 당시 억류되어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고 석방하는 거래 조건이었다. 전두환은 미국의 인정이 없으면 정통성에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응했다. 레이건 입장에도 카터의 미흡한 대처로 이미 사태는 엎질러진 물이 되었고 남한을 제2의 남베트남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정권을 승인해 남한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할 것.[* 미군 관계자는 미군은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한국 언론에 왜 사실과 다른 내용을 쓰냐며 항의했지만 이미 확산된 반미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1982년 2월에 리차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더 스테이트>지 회견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을 "버릇없는 아이들"이라고 발언해 파문이 일었다. 이후 그는 5월 관훈클럽 초청 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50700209202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5-07&officeId=00020&pageNo=2&printNo=18642&publishType=00020|"반미감정은 보편적 움직임은 아니다"]]라고 했고, 9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강연 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929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9-29&officeId=00020&pageNo=3&printNo=18766&publishType=00020|"민족적 자기중심을 탈피하라"]]고도 했다. 이후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과 1986년 전방입소 반대 및 반전반핵투쟁 등이 대표적이었고, 이후 반미가 [[운동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반미를 주창한 대표적인 운동권 단체로 [[전대협]], [[한총련]], [[한대련]], 전국연합 등이 있다. 1983년 김성만이 쓴 팸플릿 <예속과 함성>이 대학가에 유포되기도 했다. 비단 학생이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농민들도 1980년대 중반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이 개방되자 생업에 위협을 느껴 반미 감정이 암암리에 전파되기도 했다. 반미시위 때마다 피해를 입는 곳은 미국대사관과 미국계 기업, 은행, 미군기지 등이며, 이러한 시설들은 경찰의 주 투입대상이었다. [[한미은행]] 역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지분이 투입됐다는 이유로 시위대가 점거하거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6070009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8-06-07&officeId=00009&pageNo=2&printNo=6848&publishType=00020|화염병 세례를 받기도 했으며,]] 은행 내부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2250020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2-25&officeId=00020&pageNo=7&printNo=20740&publishType=00020|행명 변경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12.12와 5.18 당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의 태도는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부가 6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미국이 반대의사를 표출하면서 6.29선언을 종용한 사실 또한 유명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7007|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9740_19322.html|MBC]] 자료 참고.] 이런 미국의 행위를 알아낸 운동권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서 미국의 내정간섭을 우려하여 반미감정과 반미운동을 부채질했다. 게다가 87년 대선당시 미국의 노골적인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축하논평으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6981|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9666_19322.html|MBC]]) 또다시 운동권은 대한민국의 반미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또 1988 서울올림픽 때 미국 선수단의 비행과 NBC의 편파보도 등이 알려지면서 운동권은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반미가 아닌 심정적 반미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씨 구명운동을 벌였던 톰 포클리에타 미국 하원의원이 1996년에는 전두환 선처를 호소하며 전씨와의 면회를 추진하여 논란을 빛었다. 포글리에타의원의 이번 방한(訪韓)은 명목상으론 韓.美우호협회 초청이며 협회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경희대학교|경희대]]도 방문하는 등 4일 출국때까지 바쁜 일정을 보낼 예정이라고, 그러나 金총재의 한 측근은 포글리에타의원의 방한(訪韓) 목적중 하나가 全씨 면회이며 全씨측에서 이를 요청했다고 밝혀 주목된다.포글리에타의원은 방한(訪韓)에 앞서 金총재에게 "全씨가 면회올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가 종신형으로 감형되도록 힘써줄 것을 아울러 부탁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물어왔다는 것.이에 대해 金총재는 "나와는 상관없이 포글리에타의원이 美하원의원 자격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라"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s://v.daum.net/v/19961126210900651|포글리에타美의원 '全씨 면회 예정' 연합뉴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12800289105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11-28&officeId=00028&pageNo=5&printNo=2738&publishType=00010|DJ구명운동 미 의원 이번에는 전씨 껴안기(한겨레)]]][*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12800209104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1-28&officeId=00020&pageNo=4&printNo=23380&publishType=00010|전씨 미 의원에 면회- 감형노력해달라(동아일보)]]] , 이에 대해 전씨측은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부인하며 어느 누구도 폴리에타 의원과 면회를 요구한 바 없으며 그러한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실이면 개인적으로는 고마울수 있지만 국내 정치문제에 외국인이 개입하는 수치스러운 일인만큼 그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12900239104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6-11-29&officeId=00023&pageNo=4&printNo=23555&publishType=00010| 미 의원에 면회요청 설, 전씨측 공식부인(조선일보)]]] [[1996년]] [[11월 30일]],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光州).전남(全南)공동대책위원회(5.18 공대위)는 30일 톰 포글리에타 美하원의원(민주당.필라델피아)이 전두환(全斗煥) 前대통령의 구명운동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보도와 관련, 성명을 내 "자신의 행위가 한미간에 심각한 외교적 문제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5.18 공대위는 성명에서 "80년 광주학살에 대해 공동 책임을 의심받고 있는 미국은 포글리에타 의원의 돌출적 행동에 의해 그 혐의가 더해지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의 법무부장관은 외국인인 그의 전두환(全斗煥)피고인에 대한 접견 신청에 대해 신중히 판단하라"고 요구했다. 5.18 공대위는 이어 "이같은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의 우려를 넘어 全피고인에 대한 구체적인 구명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방한중 그의 안전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그는 방한중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인 포글리에타 의원은 30일 방한, 오는 12월 2일 안양교도소에 수감중인 全씨를 면회할 예정인 것으로 최근 일부 언론에 보도됐다.[* [[https://v.daum.net/v/19961130143400415| 5.18공대위,포글리에타의원 방한 관련 성명(연합뉴스)]]] 결국 12월 1일, 국내의 거센 반발로 포글리에타 의원의 전두환씨 면회 및 방한은 취소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20100209102009&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01&officeId=00020&pageNo=2&printNo=23383&publishType=00010|전씨 감형요청 및 면회요구, 미 의원 방한 취소(동아일보)]]] [[파일:Screenshot_20200818-133052_Samsung Internet.jpg|width=450]] [[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5명 중 2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반미 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 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979744_30717.html|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 중 1명 피난가겠다]]] 이 시기인 [[1997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간첩을 체포하여 구속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050600289102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5-06&officeId=00028&pageNo=2&printNo=2871&publishType=00010|미 무기상 래클리프 구속 미묘한 파장]]][* [[https://v.daum.net/v/19970501044700864| 美언론, 간첩혐의 미국인 체포에 예민한 반응]]][* [[https://v.daum.net/v/19970712000000635|로버트 金 對 도널드 래클리프]]][* [[https://v.daum.net/v/19970725000000690|美社에 군사기밀 유출 군수중개업자 실형선]]][*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memberNo=599582&volumeNo=10846025|일본인 시노하라 지국장 사건과 미국인 무기중개상 래클리프 사건]]]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반미 강력 주장에 적극적인 원인을 만들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769333_30717.html|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 [[1997년]] 15대 대선에서 미국 언론들의 한국 대선에 대한 보도에 대해서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1800289108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12-18&officeId=00028&pageNo=8&printNo=3068&publishType=00010|내정간섭 논란도 있었으나]] 제임스 폴리 대변인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1700099106008&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7-12-17&officeId=00009&pageNo=6&printNo=9937&publishType=00010|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한국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나라의 경제주권을 IMF에 넘기라고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자[* 이에 대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서 한국이 희생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0100099105001&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09-01&officeId=00009&pageNo=5&printNo=10461&publishType=00010|#]]] 또다시 반미 감정이 거세어졌다. 반미주의자들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금융시장을 미국식 금융자본에 종속시켜 놓는 만행을 저질렀고 한국은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부가 IMF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미국식 구조조정을 실시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여 반미 정서가 강해졌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세부 내용은 전적으로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35_19482.html|IMF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이 경제 주권을 포기할 정도]]라는 말이 있듯, IMF가 그냥 무조건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IMF의 식민지배를 받는 당시 정부의 판단하에 시행되었다. 당시 정부는 [[대우그룹]]을 날려버리는 등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정치성이 다분히 개입된 조치를 취하기도 했고, 노동운동마저 구조조정의 걸림돌로 보고 가혹히 다루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772050_30717.html|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 [[1999년]]~[[2000년]]에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재조명되면서 반미 감정이 다시 불붙었다. 각종 시민단체와 언론이 집중적으로 이를 다루었고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했다. 이로서 NL 세력들 입장에서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3만명이 전사했던 [[동맹국]]에서 죄없는 대한민국 국민 수천 수만을 학살하고 한반도를 분단시킨 [[학살자]]이자 전범국으로 뒤집어씌우기에 이른다. 2000년에 KBS2 <추적 60분>을 통해 화성 매향리 미 공군사격장 폭격훈련으로 인한 인근 주민들의 피해 상황이 다뤄지면서 반미 투쟁이 일기도 했다. 또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이 터지면서 [[운동권]]에만 주로 퍼져 있던 반미 의식이 일반 대중,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대중적이고 노골적인 반미의 모습은 묘하게 스포츠 이벤트와 함께 커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전 88 서울올림픽 때, 미국과 소련의 농구 경기 때에 한국 관객들이 일방적으로 '''소련을 응원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방송에서는 부랴부랴 반미 움직임을 걱정하는 전문가 대담이 있었다.] [[http://culturalaction.org/webbs/view.php?board=cncr_6_1&id=240|참고]] 2002년 상반기에는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가 발생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반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사건 발생 5개월 후 재판에서 미군의 무죄 판결을 계기로 수많은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대적인 반미 시위가 벌였고 많은 시민들이 이에 동참했다. 심지어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내가 제일 존경하는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구전 동요가 나돌기도 했다. 반미 시위는 나날이 규모가 커졌고 2002년 연말에는 10만여명이 서울시청 앞에 운집하여 촛불을 들고 시위를 펼쳤다.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절도, 성폭력 등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주한미군을 비판, 비난하는 의견이 있었다. 사실 주한미군 범죄는 이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주한미군 범죄는 소위 "[[기지촌]]" 문제와 함께 1960년대 전후가 피크였고 당시 남한은 미국에 감히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못 됐으므로 쉬이 근절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과 급속한 산업화로 남한의 정치-경제적 입지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한미 양측의 공조가 시작되어 1980년대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당시의 반미 열풍으로 인해 이전 시대의 주한미군 범죄들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고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같은 한국전쟁 시절 일들까지 들춰지면서 반미 풍조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특히 [[조지 워커 부시|부시]] 행정부 대의 사건들이 국내의 반미감정을 자극하는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사실 부시가 당시 반미감정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2005년에는 [[매향리]] 사격장 소음 문제로, 2006년에는 [[대추리 사태]][* 하필 2004년 MBC가 한국 동요 80주년을 맞아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동요' 설문조사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0053542|1위]]를 차지한 노래인 [[노을(동요)|노을]]의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0242|배경]]이 된 곳이다.]로 또다시 반미 운동에 불씨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이런 반미 감정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좌익 민족주의]]인데 '''우리 민족의 일에 외세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면서 반미로 흐르게 되는 것. 반미주의자들은 [[구한말]] 이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본다. 심한 경우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국가와 교류를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단절하자는 것이다. 이들을 '''[[나이키]] 신고 반미 하는 [[위선자]]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2010년대부터는 아이폰 쓰면서 나이키 신고 반미하는 스타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반미하는 사람들 중에는 삼성 같은 대한민국의 대기업에 반감을 품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나이키]]나 [[애플(기업)]]의 경우 중국, 베트남 등 저임금 노동국가에 [[OEM]] 즉 하청생산을 맡긴다. 나이키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나 애플 하청생산기업의 노동착취문제는 국제적인 이슈인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하청생산으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미제 서방 악덕기업의 수익에 일조하는 꼴이다.] 하지만 미국 그 자체가 아니라 단순히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반미를 하는 사람에게 미국 기업 제품을 쓴다고 언행불일치라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은 미국 사람들조차도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다만 단순히 위선자라는 프레임을 사용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틀렸지만[*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이 싫다'와 '미국제품이 싫다'는 전혀 다른 사항이기에 그러하다.] 반미주의의 근간에는 단순히 미국이 싫다를 넘어서 '미국의 모든 것이 한국에는 도움이 안 되고 되려 한국의 국력을 뺏어가고 있다.'라는 사상이 있는데,[* 정작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가 보호무역을 주장하니 이를 싫어한다. 미국이 한국의 국력을 뺏어가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도널드 트럼프의 보호무역은 되려 한국을 보호하는 셈인데 말이다.] 미국이 필요 없다는 반미주의자도 미국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은 미국의 국력은[* 기업들 역시 국력에 포함된다.] 한국에 필수불가결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기에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절대악이니 하등 필요없다는 이들의 근거 자체가 부정된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혐오하는 반미주의자들이 주도한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큰 반향을 얻진 못하였다.[* 실제로 반미감정이 한창 융성했던 시절, 운동권 학생회가 잡고 있던 모 학교에서는 미국 제품 쓰지 말자고도 했다. 문제는 그게 윈도우, 워크래프트3, 기타 등등이었고 당연히 나이키 등의 물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장실 등에 가면 미국제품 쓰지 말자는 구호와 함께 --그럼 국민게임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말게?-- 윈도우 등의 상표가 밑에 붙어 있었다. --간접홍보 광고비 받아야 될 듯-- 그리고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후술할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1탄에선 반미를 외치던 한국인이 미국인 미녀로부터 "미국사람 싫어하십니까?"란 말을 듣자 [[이중잣대|얼굴이 빨개지더니 "글쎄..."라고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982년 부미방 사건 관련자 [[문부식(시인)|문부식]]도 2002년 한겨레 '하니리포터' 인터뷰 당시 윤금이 사건이나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건 등도 '주한미군 철수 시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14005000/2002/08/014005000200208261448005.html|주장을 했다.]][* 2003년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0975&isPc=true|비슷한 주장이 있다.]]] 그가 말하는 요지로는, 애당초 주한미군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며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일본 오키나와 주일미군 기지촌의 사례처럼 시민사회 간의 합의를 통해 존재를 인정하며 부조리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북한이 [[박왕자 씨 피살사건]],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을 잇달아 일으키면서 범국민적인 친북 감정이나 민족주의적인 연대 의식이 많이 약화되었고,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사태 이후 미국이 즉각 [[제7함대]] [[항공모함]] [[전단(군대)|전단]] 급파를 비롯한 지원을 하자 10년 전보단 전체적으로 상당히 친미적인 분위기가 되면서 이때 미국에서도 한국의 반미의식 위축을 분석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미군기지 주변 주민들의 경우, 각종 시위에 하도 시달린 나머지 아예 반미시위대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도 강하다. 이분들은 이 시위대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주기적으로 당하는 사람들이다. 소음, 교통방해, 농작물 밟기 등... 정말 싫어할 경우 그냥 짜증나서 모인 그 근처 사람들이 단체로 쫓아온 사례도 있었다. 단체로 우루루 몰려오기는 했는데, 구심점 아래에서 뭉친 것이 아니라 낮 시간에 농사나 물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가 치솟아 집결해서 '저 새끼들 조지자!' 이러고 그냥 닥돌한 것이다. 미군 고객들에 의존하는 상인들도 반미시위 탓에 매상이 줄어들까봐 우려했고,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사태 때 팽성상인연합회와 반미단체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전의경들 입장에서는 그냥 원수들. 좀 규모가 작은 평화시위에도 전의경이 배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큼지막한 폭력시위에서는 전의경이 반드시 투입되는 것이 보통이라서 다들 정말로 싫어한다. 게다가 부대 근처에 미군기지가 있으면 잊을만 하면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나는지라. 좀 옛날 일이지만 상당히 과격했던 운동권에서는 폭력 및 구타, 협박 사건을 터뜨리거나, 1982년 [[부미방 사건]]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사건까지 일으킨 전력이 있다. 이로 인해 안 좋은 여론이 많이 일었고 최근에는 좀 잠잠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과오들이 많이 남아있으며, 문부식 등 일부를 빼곤 반성과 사과를 표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4년에 쓴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편 1권(10권)에선 "미국을 제대로 바라보고 친미든 반미든 하라"고 뼈아프게 충고했으며, 한국의 반미는 원래 미국의 패권주의와 정치권력 등을 반대한다는 원래 뜻과 달리 위와 같은 요소들을 뭉뚱그려 '미국'으로 보니 미국 그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고도 평했다. 좌익 계열에서도 비판이 있다. 친미-반미의 이분법은 결국 미국종속적인 사고의 일환일 뿐이라면서 결국 우리의 사고가 미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친미나 반미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탈미라고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딱히 용어를 규정짓지 않고 있다. 한국의 포경수술 반대론자들 중에서 포경수술이 도입되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것에 대해 미국의 영향이 있다보니 반미감정을 가진 경우도 있다. 물론 반미감정이 주 동기인 것이 아니라 인권적인 측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견 거세 보였던 한국의 반미 성향은 대중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비교적 소수인데 이는 여론조사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파일:external/img.washingtonpost.com/us-favorability-south-korea.png]]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대 중반 일시적으로 반미 여론(Unfavorable)이 친미 여론(Favorable)을 제쳤으나[* 다만 한국에서 반미 여론이 친미 여론을 제쳤던 2003년은 [[조지 W. 부시|조지고 부시는 모 대통령]]이 한창 [[이라크]]를 [[이라크 전쟁|조지고 부실 때]]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반미 여론이 강했던 때였다. 당시에는 [[독일]](호감 45%, 비호감 54%), [[프랑스]](호감 42%, 비호감 57%), [[스페인]](호감 38%, 비호감 55%) 같은 국가들에서도 반미 여론이 친미 여론을 앞서고 있었다. [[http://www.pewglobal.org/database/indicator/1/survey/4/|참조]]], 곧 친미 여론이 반미 여론을 반전시켰다. 한국의 친미 여론은 2007년 57%, 2008년 70%, 2009년 78%로 2년 사이 20% 가량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2014년 이후에는 80% 2017년에는 75%를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반미 여론은 2015년 기준 14%에 불과하다. [[http://www.pewglobal.org/database/indicator/1/country/116/|링크]] 심지어 2013년 시점에서 한국의 오바마 대통령 지지율은 무려 70%를 돌파하여 미국의 40%대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높았다. [[http://www.washingtonpost.com/blogs/worldviews/wp/2013/05/07/anti-american-countries-can-become-pro-american-heres-how-south-korea-did-it/|기사]][[http://www.pewresearch.org/fact-tank/2013/05/06/south-koreans-remain-strongly-pro-american/|기사]] 이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 등으로 일시적으로 반미 여론이 강화되었지만, 이후 연평도 포격 사태 등에서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한국을 지원하면서 국민 여론이 친미로 반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삼일절]]에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한·중·일 과거사 문제는 세 나라 모두 책임이 있다는 양비론적인 발언을 하면서 반미 감정이 다시 일어났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50301064705673|기사]] 2015년 3월 5일 반미주의자 김기종이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참고. 2015년 5월에는 주한미군이 대한민국 정부에 사전통보도 하지 않고 탄저균 실험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청 사건으로 난리가 난 유럽처럼 미국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사과와 함께 아무런 피해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다. 광복 70주년에도 반미 시위가 미 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15/2015081501768.html|관련기사]] 2017년 2월 28일에서 '''미국이 위안부 협상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드러났다.''' 이로 인해 반미주의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2017년 4월 말에 사드 기습 배치부터 [[도널드 트럼프]]의 사드 배치 비용 10억 달러 내라는 발언으로 잠잠했던 반미정서가 감지되었다. 2017년 10월에는 '방탄청년단(방미 트럼프 탄핵 청년원정단)'이라는 반미단체가, 도널드 트럼프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국에 가서 [[http://v.media.daum.net/v/20171019200717066|도널드 트럼프를 규탄하고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포스터도 만들고 SNS를 활용하기도 하였는데, 네티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리고 결국 미국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765614|이들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11월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재야 NL세력 등에 의한 반미집회가 열리자,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및 '태극기혁명 국민운동본부' 등 우익세력 및 호국보훈 단체 등이 환영집회로 응수했으며 경찰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084234|갑호비상령을 내렸다]]. 동년도엔 [[2000년]]~ [[2006년]] 사이의 우리나라의 반미주의에 대해서 주한 미국 외교관이 쓴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史: 주한 미국 외교관이 바라본 한국의 반미 현상(Anti-Americanism in Democratizing South Korea)"가 번역되어 나왔다. 참고해볼 것. 한국의 반미 운동은 강성 NL이나 [[이적단체]]가 주도하는 경우도 많다. [[운동권]]이나 자칭 진보 진영이 [[2008년 촛불집회|반미적 분위기를 이용한 선동]]을 하거나 삽질을 하고 가끔 미국 관련 음모론도 같이 퍼진다며 싫어한다. 과거의 극단적인 운동권의 예를 들어 모든 진보 단체를 싸잡아 반미주의자들이라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친러]] 성향을 보이는 곳에서도 친미 성향과 같이 나타나고, 친러를 하는 이유도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니[* 대개 중국/일본보다는 러시아가 낫다던지, 러시아와 친해지지 않으면 남북통일은 이룰 수 없다던지 등.] 말 다했다. 정작 자신들은 과거를 들먹이면서 미국을 맹목적으로 비판하지만 실제로 과거를 얘기하자면 적성국이었던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았으며[* 김일성이 남한을 얼른 치자고 수십번 요청하긴 했지만, 소련이 북한을 지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의 유엔 가입도 소련의 거부 때문에 1991년에야 이루어졌다.] [[중국]]은 아예 6.25때 [[북한]]을 위해서 직접 참전하여 싸워줬고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을 보낸 일에 대해서 스스로 잘한 일이라고 자화자찬하며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다.[* 아예 6.25를 항미원조전쟁이라고 하고, [[시진핑]]이 직접 미국에 대항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언급도 없다. 오히려 러시아에 대해선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로 친러를 주장하고 중국 역시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대략 중국은 곧 세계최강 경제대국이 되고 한국의 최대교역국이니 친하게 지내면서 돈이나 벌자 중국 조금이라도 비판했다가 중국이 보복하면 그냥 무조건 한국이 미안했다고 하고 조용히 넘기자로 요약된다.], 미국에는 지극히 원론적인 태도[* 한국과 미국은 대등한 관계이니 절대 굽힐 필요도 없고 그러면서도 한국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미국이 한국 편을 조금이라도 안 들어주면 바로 욕한다.[* 예를들어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일본 편을 들어주면 바로 욕한다. 당연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 두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고, 여기서 미국이 일본이 아닌 한국의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한다. 미국이 일본 편을 들어주는 것도 괜히 그런게 아니라 일본이 아예 미국의 충실한 조수(loyal sidekick)로 미 언론에 불릴 정도로[[https://www.washingtonpost.com/politics/japanese-leader-shinzo-abe-plays-the-role-of-trumps-loyal-sidekick/2017/11/06/cc23dcae-c2f1-11e7-afe9-4f60b5a6c4a0_story.html|#]]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2018년에는 북미정상회담과 남북화해무드로 반미가 완전히 수그러들었다. 또한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과 일본 배척 분위기로 트럼프의 호감도가 높아지며 미중 무역전쟁에 대다수가 미국을 응원하는 분위기이다. 당장 반미 단체에서 과거에 트럼프를 비판하다가 지금은 북미정상회담으로 트럼프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다. 또한 이로인해 미세먼지 날리는 중국을 욕하고 미국을 응원하는 분위기로 많이 전환되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취임 이후 민주당계 정당까지 친미화되기 시작했다. 민주당계 정당은 트럼프의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비핵화 정책을 지지했고, 대신 보수 세력은 트럼프가 우리야 어떻게 되든 북한의 핵을 동결만 시키고 미국까지 가는 장거리 미사일만 폐기하는 방식으로 협상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오히려 보수가 반미 쪽으로 가는 듯 하기도 했지만, 사실 미국 자체에 대한 반미라기보다는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한 것에 가깝다. [[http://m.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0364|#1]],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4242491|#2]] 보수는 주류 보수정당이나 언론에서 반미성향을 보인 적이 없고 미국 공화당이나 민주당과 여전히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를 비판한 것이지 반미를 한 것은 아니다. 지소미아 종료가 임박하자 일부 극좌 단체들의 주한미군 철수 등의 반미운동이 다시 나오고 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어차피 한미동맹 파기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 철수는 불가능하다.-- --가능했으면 진즉에 철수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듯한 반미 운동이 트럼프 정부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및 [[해리 해리스]] 대사를 문제삼아[* 다만 이건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의 주한미국대사관저 침투사건 때문인 점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데, 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저 행위는 주거침입죄가 성립되는 불법행위다.] 다시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친문 네티즌들이 해리스 대사가 기른 콧수염이 일제 순사를 연상시킨다며 콧수염까지 문제삼는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심지어 여당에서도 [[송영길]] 등의 정치인이 해리스 대사를 조선 총독에 비유하거나 대북문제는 자주권이라고 주장하는 등 서서히 반미감정 조장의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홍콩보안법 등으로 강해진 반중성향에 의해 묻힌 감이 강하며 저 반미감정 조장은 민주당계 일부 지지자들에 한정되어 있다. 오히려 민주당계의 가장 큰 지지층인 [[친문]]은 반미와는 거리를 두는 성향이다. 이후 바이든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다만 미국의 정권이 한국의 민주당계와 지향하는 바가 다른 방향의 정책을 편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반미 성향은 일부 한국 영화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로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나온 영화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미군이나 미국이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빈도가 높다. 물론 작품내에서의 묘사나 스토리 진행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이런 부정적인 요소가 메인이 아닌 경우도 많으므로 이 시기에 미국의 세력이나 등장인물이 나오는 한국 영화 전체를 반미 영화로 규정짓는 행위는 옳지 않다. 젊은 세대들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젊은 세대들 중에서 영어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즉 속된 말로 [[영포자]]들은 반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간혹 있다. 다만 정치적인 반미랑은 차이가 있다. 2023년 [[일본 오염수 방류 논란]]에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들면서 이에 비판적인 좌파 측에서 반미감정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듯 했으나, 중국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가 또다시 불거지고 논란이 심화됨에 따라 이러한 여론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또한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와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발언을 하는 사건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반중 감정이 극에 달하며 반미 여론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황이다. 2021년에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의 철수 이후, 탈레반을 독립군으로 비유하면서까지 반미 정서의 일부 기사들까지 올라왔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은 "일제시대때의 독립투사들 모독하는 거냐?"라는 냉담한 반응이 압도적이다. 결국 이런 반미 행동이 오히려 [[까가 빠를 만든다|반미에 대해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데에 일조하게]] 돼버렸다.[* 탈레반의 성향을 잘 보자. 낮은 여성인권, 지나치게 짙은 내셔널리즘 등으로 인해 [[아메리카 연합국]], [[일본 제국]], [[나치 독일]], [[크메르 루주]]의 21세기판이자 [[북한]]과 2013년 이후의 [[중국]], [[미얀마군]] 치하의 [[미얀마]],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버전이라 할 정도로 성향이 엄청나게 극단적인 세력이다.] 2022년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개전 이후에 반미성향의 [[러빠]]들의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범죄를 심각한 오류적 논리까지 써가면서 러시아와 푸틴을 옹호하고 미국,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비하를 함으로서 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서 반미성향에 대한 역반감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미국도 전쟁범죄를 많이 저지른 흑역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전쟁범죄 옹호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범죄들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 중 소수민족 관련은 일제 당시의 한국이 피해받았던 일본의 전쟁범죄 및 국가폭력과 상당히 유사하다.] 최근에는 주한미군 철수 시위 구호를 할때 "주한미군 철수"가 아닌 "주한미군 '''철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보수 우파 진영 내에서도 독자적 핵개발을 지지하는 이들의 경우 반미 정서가 나타난다는 카네기 재단 등 미국 주류 분석가들의 평가가 있다. [[https://carnegieendowment.org/2023/01/25/dueling-nuclear-nightmares-behind-south-korean-president-s-alarming-comments-pub-88879|#]] 다만 미군 철수까지 주장하는 급진 좌파 진영에서의 반미 정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 외에 외교나 역사 문제[*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일제강점기, 러스크 서한, 애치슨 라인, 미군정의 실책 등.]가 아닌 문화적 반미주의의 경우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반대하는 일부 보수 단체, [[보수정치 마이너 갤러리]] 등에서는 미국을 [[인권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며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해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사례를 언급하면 사대주의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반 [[정치적 올바름|PC]]성향의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경우가 있는데, 미국이 PC문화의 총 본산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지하게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가진다기보다는, 미국의 [[헐리우드|문화적]] [[비디오 게임|위상]]이 PC에 매몰되어가는 것을 한탄하거나 놀리는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이런 언급이 나오는 커뮤니티 등지를 보면, PC를 이유로 진심으로 반미를 외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PC가 활성화되었다는 이유로 싫어하려면 미국만으로는 끝나지 않기도 하고(...)[* 당장 위의 캐나다뿐만 아니라 서구권 대부분이 PC를 정책적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많다.] 또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수록 반미 성향이 되는 성우도 있는데, [[이라크 침공]] 등 미국이 [[패권|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네오콘|거짓말로 정당화]]한 사례나, [[이란항공 655편 격추 사건]] 등 [[전쟁범죄]] 행위를 저지르고도 덮고 넘어가거나 [[PRISM|우방국을 감청]]하는 등 사례를 알고 보면 [[미국]]이 내새우는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의 수호자 이미지가 [[위선]]적으로 비치기 때문. 다만 이런 인식은 결과적으로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같은 인권탄압을 일삼는 반미 종주국들과 [[도긴개긴|다를 바 없는]] [[깡패]]국가라는 인식으로 확장되어, [[상임이사국]]들을 위시한 '''[[강대국]], 열강국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단순히 [[반미]]만으로 끝나지는 않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이미지와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 시점 한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친미]]의 영향력이 막대해 미국의 과오가 다소 [[무관심|묻히고]] 미국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마저 [[이적행위]]로 [[매도]]당하는 감이 있지만, 미국 내부에서 자국을 비판할때도 종종 이런 위선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는 [[이라크 전쟁]] 문서의 예술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