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가사유상 (문단 편집) ==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의 연관성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Maitreya_Koryuji.jpg|width=450]] || || [[파일:반가사유상1.jpg]] || || 좌측이 한국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우측이 일본의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다. || [[일본]] 국보인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1960년, 한 대학생이 우연히 작품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연구자들이 복원하려고 그 재질을 연구해보니 적송 [[소나무]]였다. 이 적송 소나무는 일본열도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자라는데,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많다. 조사 결과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쓰인 적송의 원산지가 경상북도 봉화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조 반가사유상은 재질, 양식, 형태 모두 [[삼국시대]]의 목조 불상과 비슷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의 물방울]]에서도 거론된 바 있었다. 불상 전체가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일부 부분에는 일본에서만 자라는 [[녹나무]]를 쓴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해진 재료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쇼토쿠 태자]]가 신라에서 받아온 귀한 불상을 모셔 절을 지을 것을 명하고, 이 명을 받는 사람이 신라계로 추정되는 [[도래인]]인 [[하타]]씨(秦氏) 일족의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河勝)였기 때문에 신라에서 온 불상이라는 설이 더 강력하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하타씨의 시조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는 [[진시황]]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보기도 한다. 진시황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자칭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건 [[하타]] 항목 참고. 그러나 메이지 시대, 약 100여 년 전쯤 고친 얼굴 부분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미묘함이 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의 이 상을 평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또한,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관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종종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소개 되는데, 정확히는 '미술품 조각 부문의 제1호'다. 덧붙여 역시 한일간 역사 논쟁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는 '미술품 고고(考古)자료 부문의 제15호'다. 일본 현지에 가보면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국보 1호라는 걸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본 인터넷에서 국보1호를 검색해 봐도 이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국보 1호로 소개하는 사이트와 서적들이 많다. 고류지에서는 이 반가사유상 외에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이 하나 더 있다. 구분을 위해서 위의 반가사유상은 보관미륵, 뒤의 반가사유상은 우는 미륵 혹은 보계(상투)가 높이 틀어져 있어 보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계 미륵이라고 부른다.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고류지의 여러 국보급 불상들은 절 내부의 전시관격인 '신레이호덴(新霊宝殿)'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교토를 찾는 관광객들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절 자체는 입장료가 없지만 신레이호덴은 800엔 입장료를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