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가사유상 (문단 편집) === 국보 제83호 ===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nsive_Bodhisattva_01.jpg|width=100%]]}}}|| ||<-3><:> '''{{{+1 [[대한민국 |{{{#FFFFFF 대한민국}}}]][[대한민국의 국보|{{{#FFFFFF 의 국보}}}]]}}}'''[br]''{{{#ffffff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3><#ffffff> [[파일:문화재청 CI_좌우.svg|width=150]] || ||<|3><:> '''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 영어 ||<:>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 ||<:> '''분류번호''' ||<-2><:> '''{{{+1 {{{#F39100 국보 제83호}}} }}}''' || ||<:> '''소재지''' ||<-2><:>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 ||<:> '''분류''' ||<-2><:>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시설''' ||<-2><:> 1구 || ||<:>'''지정연도''' ||<-2><:>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2><:> 삼국시대 7세기 초반[* 78호와 달리 이 반가상은 [[신라]] 제작설이 학계 정설이며 고구려 제작설은 아예 없다.]|| 국보 제83호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4억 7천만원[* 이전에 지금 돈으로 20억원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인플레이션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보다 쌀 가격을 기준으로 잡는 편이 더 현실에 가까운 금액이 나온다.])을 주고 구입했다."라고 적혔다. 당시 쌀 한 가마를 살 때 가격이 1원으로, 2600원이면 쌀 2600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에 대해서 옛 [[백제]] 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과 옛 [[신라]] 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다툰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상]]을 처음 발굴한 인간들이 [[일본]]의 도굴꾼들이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이 [[불상]]이 어디서 출토됐는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1912년에 83호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 말했다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에 대한 진술이 엇갈린다. 두 불상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모의고사에서 특정 지역을 연결하면 틀린 답안으로 취급되며, 삼국시대라고 뭉뚱그린 경우에만 정답으로 인정된다. 공무원 수험서 역시 확실한 제작지를 알 수 없다고 서술된 경우가 많다. 현재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나와 있다. 83호는 [[신라]]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83호와 매우 유사한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 고류지의 창건자가 신라 계통 [[도래인]] 성씨인 [[하타]]씨를 쓰는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何勝)이며, 《[[일본서기]]》에 623년 신라에서 온 귀한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재질이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 [[소나무]]인데, 적송 소나무는 특히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많이 자란다. 정밀 분석 결과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진 83호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데 크게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일본 사학계도 이를 인정한다. 또다른 근거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반원 세 개를 이어붙인 모양을 한 보관('''삼산관''', 三山冠)은 신라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에서만 고유하게 발견되는 형태이다. 또 그동안 경상도 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반가사유상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근거다. 1966년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서 발견된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과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옷주름이 매우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비록 북지리 반가사유상은 하반신 부분 일부분만 남아있지만 오른다리 아래의 옷주름 양각 묘사는 거의 판박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기부터 신라 권역이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 유산리[* 이후 물금면에서 양산읍으로 옮겨져 지금은 [[유산동(양산)]]이다.]에서 출토된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역시 옷주름 양각 묘사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밀접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2018년]] 4월에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신라 절터인 흥녕선원지에서 신라에서 제작된 [[영월 흥녕선원지 출토 금동반가사유상|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석조가 아닌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 중에서는 그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흥녕선원지 금동반가사유상은 신라 반가사유상 고유의 특징인 '삼산관'을 쓰고, 전반적으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축소한 형태라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출토 장소가 명확하진 않지만 위 서술과 같이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여럿 있었던 것도 신라설에 힘을 보탠다. 상술했다시피 충청도에서 발굴되었다는 당대 증언도 없진 않지만 경주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하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특별전에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전시되었다는 점은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정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고증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측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문체부에 수차례 요청한 끝에 83호의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로 당시 83호의 지나친 해외반출을 우려한 문화재청은 메트로폴리탄에 78호를 대신 대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메트로폴리탄 측에선 신라특별전에 백제의 유물일지도 모르는 78호를 어떻게 전시하겠냐며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83호에 있어서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요 근거는 남북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에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이렇게 세련된 걸작품을 만들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금속공예작품을 봐도 백제에 밀리지 않는 솜씨를 자랑한다. 신라 금관 세트나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두]]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쌍의]] 감은사지 사리함 등이 그 증거다. 감은사지 사리함은 비록 삼국통일 직후 작품이지만 고구려 백제의 멸망 직후에 만들어졌기에 그들의 기술과 인력이 통일신라 사회로 녹아들기 전이다. 중국과 거리가 먼 특성상 신라가 국가 발전과 중앙집권화가 가장 늦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반가상들의 제작년대로 추정하는 6세기~7세기에는 이들의 문화가 여전히 고구려, 백제보다 뒤떨어졌다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 [[파일:banga_tric.jpg|width=70%]] || ||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본래 얼굴을 알 수 있는 금칠 일부 복원버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 || 또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특유의 미소와 형태가 백제 양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서산마애삼존불]]로 상징되는 '백제의 미소'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의 양식은 거리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오히려 신라 불상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미소'보다는 차라리 '[[신라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997호)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 양식보다는 신라 양식과 거의 똑같다. 사실 자료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고대사 연구의 특성상 이 정도 근거면 충분히 교과서에 정론으로 실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역 학계의 이기주의로 인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예 교과서에 싣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인 금동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거나 유력하다고 서술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일부 문서에는 83호가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저술한 『처음 읽는 일본사』에서는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의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의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EBS]]의 대표 국사 강사 [[최태성]]도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에서 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다만 최태성은 이후의 강의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정정하여 가르친다. 여하튼 최근에는 이러한 서술이 많이 정정되고 있는 추세다. 실제 [[선덕여왕]]의 얼굴이 반가사유상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다.[[https://shindonga.donga.com/culture/3/05/13/100381/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