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흥주 (문단 편집) == 생애 == [[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태생으로 [[6.25 전쟁]] 당시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당시 손꼽히는 명문고였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원체 집안이 가난했던지라 등록금 걱정이 없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박흥주를 비롯한 16~18기 전후로 입학한 사람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육사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시에서 최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일반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육사에 진학한 것. 이들이 입학했을 시기는 [[이승만]] 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출세를 목적으로 진학했다고 보긴 어렵다. 육사 출신이란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엄청나게 강했으며 이는 [[전두환]] 등 선배 기수를 필두로 한 [[하나회]] 세력의 결집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육사 18기 졸업 후 1962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우수한 졸업 성적 덕에 [[제6보병사단|6사단]]에 배치되자마자 [[관측장교]] 보직을 건너뛰고 바로 [[전포대장]]에 보임되었다. 전포대장 보직을 마치고 간 자리가 운명을 바꿨다. 6사단장의 [[전속부관]][* 전포대장 시절 보여준 뛰어난 브리핑으로 김재규의 눈에 띄었다. 지금도 전속부관은 장성들이 자신이 미리 눈여겨본 유능한 젊은 장교를 불러다가 앉히는 경우가 많다.]이 되었는데 당시 사단장이 다름아닌 '''[[김재규]]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흥주는 김재규의 심복으로 분류되었다. 또 줄곧 주목받던 뛰어난 기량 덕분에 항상 동기생 중 최고 선두로 진급하는 그룹으로 분류되어 1978년 4월 임관 16년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령 진급자로 선발되었다. 중령 시절 12사단 포병대대장 보직을 마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대령 진급선발 후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 수행비서관이 되었고 이 자리에서 12월 대령에 진급했다. 이처럼 그는 군사정권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장교였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으로 인맥까지 갖췄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떵떵대며 살 수 있는 위치였다. 평범한 육군 대령이래도 가난한 군사정권 국가에선 당대 상류층으로 꼽혔고 군인 녹봉 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 집에 온갖 가재를 갖춰놓고 살았다. 그런데 정작 육사 출신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였던 그는 군인 녹봉만으론 절대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등 청렴함으로 인한 가난에 부끄러움을 갖지 않았기에 그의 집은 중구(현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허름한 반지하 [[판잣집]]이었다.[* 박 대령을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중정 비서관이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행당동 달동네에 살았다."고 언급했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9527|#]]] 그의 비리를 용납하지 않는 청렴함은 주변의 두터운 신망을 샀다. 전두환의 심복 중의 심복이던 [[장세동]]조차 박 대령의 사형 집행 후 "유족들에게 연금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가 한소리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보직에서 일선 연대장으로 나가기를 희망했으나 김재규가 몇 달만 더 하라고 붙잡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박 대령의 운명은 또다시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 김재규의 지시로 안가 경비원 이기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함께 식당에 있던 경호원 사살에 가담하였고[*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서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살해하였다.]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김재규가 보안사에 체포되면서 박흥주 대령 본인도 결국 구속되었다. 그러나 박흥주는 체포 후 교도소 벽에 "[[예양|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낙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거사 계획을 말했을 때 부하들이 군말없이 모두 따랐다는 점을 보면 김재규의 카리스마와 부하들의 신망은 대단했던 듯 싶다. || [[파일:external/hadream.com/8aea67fec3de7993c229121cd67c044e.jpg]] || || ▲ 아버지 박흥주의 선처를 눈물로 탄원하는 두 딸들의 모습 || 김재규는 박흥주, 박선호 등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선처를 바랐고 초등학생이었던 두 딸이 기자들 앞에서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라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울부짖으며 탄원했지만 공범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건 당시 박정희, 차지철을 제외한 나머지 사망자 중 박선호가 살해한 정인형, 안재송을 제외한 김용섭, 김용태가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며 군법을 배제하더라도 계획적으로 다수를 살해하면 사형이 원칙이었던 시절이므로 사형을 면할 수는 없었다.] [[군사재판|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스승인 김재규의 생일인 1980년 3월 6일 41세의 나이에 [[총살형]][* 현역 군인 신분을 가진 자(병, 부사관, 장교 및 후보생들)들의 사형은 총살형으로 집행된다. 주범인 김재규 등은 법적으로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으로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 과정에서 M1 소총으로 흉부에 3발을 맞았는데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결국 머리에 권총을 쏴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사형장 출입기자 중 서울고등학교 동기생이 있었다.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110459#0DKW|#]]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로 형 집행을 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고 [[경기도]] [[포천시]] 재림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비상계엄 하에서 현역 군인에 대한 재판은 단심제[* 당시 군법회의법 제525조(현행 군사법원법 제534조). 현재도 비상계엄 하에서의 군인은 단심제이지만, 1987년에 법이 개정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경우에 한하여 항소 및 상고가 가능하다. 비상계엄이 아닌 평시에는 민간과 같은 3심제이다. 1심 지역군사법원, 2심 서울고등법원, 3심 대법원으로 진행된다.]이기 때문에 형의 집행도 관련자 중 가장 빨랐다. 그러나 관련 사건의 재판[* 그것도 대법원 전원 합의체]이 아직 진행 중이었음에도 박흥주 대령만 사형을 우선 집행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 [[파일:attachment/park_heung_ju.jpg|width=100%]] || || ▲ 사형 집행 당시 모습 (가운데)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