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흥숙 (문단 편집) == 언론 보도 ==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086706800168369122&search=%B9%DA%C8%EF%BC%F7|2004년 광주일보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42100329207009&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4-21&officeId=00032&pageNo=7&printNo=9711&publishType=00020|1977년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910154|생존자 인터뷰]] 당시 박흥숙 사건을 대한 언론은 중립적으로 사실을 보도하기보다는 박흥숙 개인과 그의 가족에 대한 편견을 투영하였다. 박흥숙에 대해 사실관계를 틀어서 나쁜 점을 부각한 문제라면 박흥숙의 어머니인 심금순이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려 광주시내의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다'라는 보도가 마구 쏟아진 바 있다. 나아가 이것도 모자라서 당시 판자촌과 무등산 일대를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곳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심금순은 무당의 잡일을 돕는 댓가로 생계를 꾸리던 가난한 사람이였다. 박흥숙이 무예를 연마해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력과 완력을 지닌 사람처럼 당시 보도됐지만 박흥숙이 배웠다는 무술은 조선시대의 무예였던 정도술이 고작이였다. 박흥숙의 살인에서 등장한 [[사제 총기]]에 관해서 당시 언론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박흥숙이 이전에 만든 총이라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그 총은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 정도였고 산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호신용 무기였다. 그리고 살해 현장인 그의 공부방, 즉 구덩이에 관해서 경찰과 언론은 그가 사람이 오면 죽이기 위해 이전부터 파 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증언에 의한 실상은 집이 철거될 것을 예상한 그가 집이 철거된 이후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파 놓은 구덩이였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1341.html|#]] 또 경찰의 발표 내용과 달리 박흥숙은 자수했고 상계동의 이모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받은 보고에는 그가 서울 방향으로 도주한 후에 중앙정보부에 자수해서 검거됐다고 되어 있다. 즉, 경찰 내부의 보고체계와 발표내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박흥숙이 간첩신고를 하면서 이를 신고한 자신이 살인범 박흥숙이라고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언급되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판결문에도 인정이 되었다. 당시 보도에서 이 살인 사건의 발단인 무허가 판자건물을 철거하면서 불을 질렀던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숨기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이전부터 있던 도시 빈민 철거에서 벌어진 여러 사례로 인하여 민심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였던 듯하다. 다만 신인 르포작가 [[김현장]]은 월간 <대화> 지[* 여해 [[강원용]] 목사가 세운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발행한 잡지이다.]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과 인간 박흥숙'이란 기고문을 내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반박했다. 오늘날에도 방송으로 나온 내용 중에서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한 언론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94화)와 팟캐스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방송분 69화 박흥숙 특집,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정도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